심보선 시인
최근 오랜만에 고등학교 선배를 만났다. 그는 법무회사에서 일하는 기업변호사였는데 술이 좀 들어가더니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네가 하는 학문이나 예술은 참 ‘공소’한 거 같아. 이건 욕이 아니야. 크게 보면 그런 일도 사회에 기여하지. 그러니까 잘 해. 사회가 너희 같은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있으니까 말이야.” 선배의 일은 ‘M&A’라고 했다. 그 일은 기업의 생존 및 성장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에 나의 직업과 달리 ‘생산적’이라고 했다.

사실 아담 스미스는 법률가라는 직업을 ‘천한 서비스’, 가장 비생산적인 노동으로 경멸해마지 않았다. 반면 현대사회에서 법률가는 시기를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사회적 위신을 가진 직업이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도 법률가라는 직업을 의술, 플루트 연주, 연극 공연 등과 함께 ‘고차원적이고 위대한 인간 활동’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는 그런 직업들이 폴리스를 만드는 정치적이고 공적인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변호사는 그 반대이다. 오히려 가장 사적인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변호사의 사회적 위신은 어디서 오는가? 아담 스미스로 다시 돌아간다면, 여전히 기준은 생산성이다. 아담 스미스는 M&A가 생산적이라고 볼까? 적어도 자기가 살던 시대의 법률가들의 고담준론보다는 그렇다고 볼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엄밀히 말해 변호사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이는 크지 않다. 실제로 아담 스미스는 “철학자와 거리의 짐꾼은 재능과 기질의 차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생산성에 기여하는 정도가 별반 다르지 않음에도 왜 변호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보다 높은 사회적 위신을 갖는가?

이에 대한 ‘하나’의 답을 토르스타인 베블렌이 제공한다. 1899년 미국에서 출간된 『유한계급론(Theory of Leisure Class)』에서 베블렌은 현대의 위신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 특히 과시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과시소비란 다른 사람들이 생산에 삶을 바칠 때 자신들은 생산 활동으로부터 면제될 정도의 부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유한계급의 ‘비생산적’ 소비를 말한다. 베블렌에게 비생산적 과시소비의 대상은 가구, 패션, 스포츠, 애완동물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넓다. 그는 심지어 예술과 학문까지 과시소비에 포함시킨다. 여기서 ‘무관심성’, ‘초연함’이라는 미학·과학의 자율성 원리들은 속물근성의 발로에 불과하다. 사실 변호사에 대한 사람들의 부러움은 그들이 고액연봉 때문에 높은 ‘삶의 질’을 구가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삶의 질이란 먹고사는 데 필요한 부분을 넘어서는 ‘잉여-풍요’의 다른 말 아닌가. 그래서 변호사들이 여가를 즐길 여유가 없는 일하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내심 안도할 것이다.

내가 베블렌의 『유한계급론』을 재미있게 읽은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통렬함이다. 자본가 계급을 가장 날카롭게 풍자한 이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베블렌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을 합리적이라 보았다. 그들의 소비는 자본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생산적’ 소비였다. 반면 베블렌에게 유한계급은 사회의 합리적 진화를 거스르는 약탈적 야만인들의 후예다. 그들은 저열하게 과시하는 속물일 뿐만 아니라 게걸스러우면서도 순응적인 동물이다. 두 번째, 시의성이다. 베블렌의 사회 이론은 한 세기가 지났는데도 현대적인 적합성을 갖는다.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가 생산으로부터 소비로 이동해 갔기 때문이다. 소위 ‘혁신’과 ‘창의성’이라는 현대 자본주의의 가치는 스타일이나 개성 같은 재화 생산과 무관한 영역에 대한 투자를 강조한다. 현대의 최첨단 직업들이 스스로를 포장하는 ‘보보스’, ‘창조계급’ 등의 개념들은 금욕주의적인 생산성의 신화를 낡은 것으로 치부한다. 오히려 소비에 생산을 종속시킬 때, 아니 소비만을 추구할 때 ‘좋은 사회’는 달성된다. 물론 베블렌이 보기에 이는 잘못된 진화겠지만 현대사회에서 소비는 인간이라는 ‘종’을 유지하는 가장 핵심적인 활동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세 번째, 남다른 유머감각이다. 베블렌의 문체는 매우 건조해서 지루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하품이 나올 때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나면 절로 웃음이 터진다. “개는 값이 비싸고 대개는 생산적인 목적에 전혀 기여하는 바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명성을 얻는 데 필요한 동물로 여김에 따라 확실한 입지를 보장받는다 (중략) 개는 이처럼 유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중략) 사람들은 애견가들에 의해 개량되고 사육되는 기괴한 모양의 온갖 잡종 개들까지 아름답다고 믿게 된다.”

베블렌에 따르면 변호사 선배와 학자·예술가인 나는 과시소비자라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금 더 웃는 낯으로 서로를 대했어야 했다. 정말 그런가? 아도르노는 모든 정신적 활동을 무차별적으로 과시소비로 치부하는 베블렌의 이론을 ‘문화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베블렌은 오로지 생산성이라는 관점에서 문화를 비방하는 산업주의자, 진화론자, 기계론적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이다. 부정하고 초월하는 문화를 보지 못한 베블렌은 “키치를 문화에 근거해 설명하지 않고 문화를 키치에 근거해 설명”하는 오류를 범했다. 과연 베블렌은 인간의 종언을 본다. 속물과 동물로 전락해버린 인간을 보며 측은지심은커녕 날카로운 풍자의 칼날을 들이댄다. 사실 나에게는 선험적 비판 이성에 대한 아도르노의 맹신보다는 베블렌의 서늘한 현실주의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지적은 한 가지 점에서 타당하다. 베블렌의 인간관은 너무 협소하다. 그는 타인과의 호혜적 관계 속에서, 오로지 그러한 관계 속에서만 위대성과 정체성을 추구하는 인간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인간관으로부터 베블렌이 보지 못한 또 다른 현실적 삶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아렌트가 강조한 ‘말과 행위’로서의 삶이다. 이때 삶은 다원성과 동등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정치적 실천이며, 그리하여 자유를 향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인간의 길은 참으로 지난하고 장구하다. 그 길은 동물과 속물 사이에 난 위태로운 길이다. 그 길은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이 내는 험난한 길이다. 결국 인간은 바로 그 길 자체인 것이다.

심보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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