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화의 『조선무속고』(서영대 역주, 창비 2008)

삽화: 김지우 기자
한국 민속학의 태동기
민족적 논제였던 ‘민속’

최근 탈식민적 학문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우리 학문에 덧씌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허구를 벗겨내려는 시도가 줄을 잇고 있다. 동아시아 담론 세우기는 20세기 인문학자들이 추구해온 서구 중축의 지배담론을 명문화한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민중 문화에 비문명적이라는 멍에를 씌었던 편협한 지식층의 문화보기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민중 신앙과 정신 그리고 얼이 함께 어우러진 ‘무속’은 논의 그 자체로서 ‘민족문화 바로 세우기’의 필연적 요소로 등장하였고 또한 식자들의 보편적 인식체계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은 무속을 밖에서 유입된 외래 종교들과 달리 이 땅에서 자생적으로 자라온 민족종교로 인식하고 연구를 통해 민족사와 문화의 독창성을 찾고자 함은 물론 민족적 뿌리를 튼실하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민속학을 태동시킨 이능화, 최남선, 손진태, 송석하, 임석재 등 문화민족주의자들이 연구 주제로 무속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한편, 20세기 초 민족문화 기원에 관한 서술은 역사 재인식으로부터 출발했다. 산발적으로 남겨진 기록을 최대한 발굴하고 이를 객관적 실증주의 입장에서 체계화하여 민족 문화의 틀을 회복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무속’은 식자들의 흥미를 더욱 북돋우며 민족적 논제로 떠올랐다.

한국 무속이 처음으로 학문적 대상이 된 것은 식민지 지배담론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등의 연구에서다(최석영). 그러나 1927년 『계명』(19호)에 발표된 『조선무속고』는 『살만교차기』와 함께 문헌고증학에 입각한 최초의 한국인 연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능화(1869~1943)의 『朝鮮巫俗考』(1927)는 지금까지 이재곤 완역(1976), 김열규 부분역(1976), 김택규 완역(1986) 등 세 번의 한국어 번역이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이것은 세밀한 작업이 요구되는 터라 본문의 오자, 오기, 오용, 오해, 곡해, 속단 등이 늘 숙제로 남겨졌다. 그런데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20여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된 서영대 선생의 역주본 『조선무속고- 역사로 본 한국 무속』은 기왕의 문제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 종교사 백과사전
역사·문화적 종교연구

전체 20장 166절로 구성된 『조선무속고』는 근거 문헌의 원문 제시, 서두 개괄, 출전, 주명, 주해와 세주, 안설(按設)이 곁들어져 사료 모음집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한국종교의 근원과 전래과정 그리고 그 정체를 밝히고 있는 일종의 한국종교사 백과사전과도 같은 커다란 가치를 지닌다. 고로 무속의 근본을 따질 수 있는 무교법전(巫敎法典)이나 다를 바 없다. 또한 역사적 무속 관련 사료를 망라하여 이 책에 집성함으로써 통시적·공시적 체계 속에서의 무속 보기가 훨씬 수월해졌으며 무속사의 흐름을 일괄되게 체계화하여 무속 연구의 대들보와 같은 원전(原典) 역할을 한다. 역사 관련 내용을 서술하다보면 궁핍한 기록으로 인해 상상은 많아지고 추측과 예측이 득세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종종 허황된 날조가 당연시되는 오류를 범하는 현실 속에서 『조선무속고』는 무속사 서술의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무속은 신앙 그 자체이며 이는 믿음이 전제되어야만 존속되는 지극히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체계의 종교다. 따라서 이에 대한 입장은 연구자마다 두 갈래에 설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역사 문화로 이해하면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종교로서 바라보는 연구가 있고, 다른 하나는 신앙을 초월해 역사·문화적 현상으로만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가 있다. 이능화는 후자에 서 있는 연구자다. 무신 존재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327쪽 등). 연구자의 그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조선무속고』는 민족정신을 회복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으며, 일제의 문화동화정책에 맞서 민족문화의 뿌리를 고찰하는 데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문헌고증학의 한계 및
역주 재론의 여지는 남아

버려진 문화를 옥석으로 다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과정이 중요하다. 무속을 연구하면서 실증주의를 초월해야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궁핍한 유형 자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현상에만 치중하여도 온전한 덩어리를 살펴보기가 어렵다. 살아있는 전승현장은 간헐적이지만 기록되고 문서화된 사료와의 호혜적인 상호보완을 통해서만이 건실한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만 논리에 대한 신뢰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현장에서 살아 숨쉬는 민중의 무속은 20세기 초 이능화을 통해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우리네 것으로 인식되었음이 분명하다. 현장을 살리는 민속조사는 과학적이다. 그리고 참여관찰에 의한 현장조사와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구술면담은 자료제공자들과의 비교 검증을 필요로 한다. 단순한 질문이나 한두 번의 참관으로는 현장이 포착되지 않는다. 문헌고증학의 한계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이능화의 『조선무속고』는 그런 점에서 아쉬움을 갖게 한다.

역주에도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역주자는 ‘군왕신’에서 군왕 또는 군웅을 장군신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는데(326쪽),이는 막연한 풀이가 아닌가 한다. 본문에 보면 ‘군왕신(郡王神)’은 속칭 ‘군웅(君雄)’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군왕(郡王)이 와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같은 쪽). 그런데 역주자는 ‘군왕 또는 군웅’이라고 하여 이능화가 군웅이 군왕의 와전이라 본 것을 간과하였다. 군왕(또는 군웅)을 장군신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에는 자세한 풀이가 필요하다. 또한 무속이 불교와 도교 등 외부로부터 유입되었거나 또는 영향을 받았다고 전제하고(53쪽), 고리짝 긁기는 여진족 영향(원문 13장 9절), 가상명혼(嫁?冥婚)은 원나라의 영향(원문 19장 9절 4항), 무가에 강남조선(江南朝鮮)이라는 말이 나오는 점(원문 15장 2절) 등을 언급하며 한국의 무속은 중국 강남 지역의 소수 민족과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53쪽). 이능화는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로부터 논지를 차용하고 이를 그대로 따르는 오류를 범했으며 역주자도 이를 그대로 습용(襲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고리짝 긁기는 서울 경기 지역의 무속의례로서 망자의 장례를 치른 날 죽음을 맞이한 자리에서 고리짝을 나무 막대기로 긁어 소리를 내며 신을 부르고 공수가 나오도록 하는 오랜 전통이다. 이 의례에 대해서 비교연구는 물론이거니와 민속조사마저도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 제주지역에서는 미혼 사망자들 간의 결혼식을 ‘사혼(死婚)’이라고 하여 오늘날까지 전승하고 있지만 ‘가상명혼(嫁?冥婚)’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으며(진성기) 또한 외부로부터 유입된 의례라고 입증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따라서 사혼은 우리나라 전국에 퍼져있는 보편적 무속의례이므로 『주례』나 『오주연문장전산고』기록을 그대로 옮긴 이능화의 원문에 대해 비판이 부가되어야 할 것이다. 무가에 강남조선(江南朝鮮)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고 해서 한국 무속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다는 설도 역시 재론의 여지가 있다.


현재적 주해 포함된
역주자의 노력 돋보여

서영대 역주본 『조선무속고 - 역사로 본 한국 무속』은 현재적 민속자료에 기초하여 주해를 달기도 하고 무속현장의 전승 사진자료도 곁들여져 있어 학문이 하나의 설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험적이고 실천적 범주에서도 논의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굳이 구체적이거나 현실적이라는 수사를 붙이지 않더라도 이는 분명 우리 시대의 지성인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충실한 주석에 치밀한 주해를 부기한 품격 있는 주석본을 넘어 서술의 기법과 종교 구조 분석에 능란한 역주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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