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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여성학, 날개는 있다한국 여성학의 갈길을 묻다

   
 
  삽화: 안하영 기자  
 
여성학의 정체성은 애매모호해 보인다. 사회과학의 한 분과학문 같지만 실상 그렇지도 않다. 한국 여성학의 중심인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들의 전공은 다양하다. 김은실 교수는 인류학, 허라금 교수는 철학, 조순경 교수는 사회학을 전공했다. 학제 연구를 통해 현실 속 남녀의 문제를 분석하는 여성학은 자칫 여러 학문을 단순히 건드리기만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성학은 그 자체의 뚜렷한 정체성이 있으며 성장통을 겪으면서도 점차 발전하고 있다. 『대학신문』은 현재 여성학의 현황을 분석하고 여성학이 고민하고 있는 젠더의 문제와 여성학의 학제적 성격 등에 대해 여성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위기에 봉착한 한국 여성학=이화여대는 1977년 여성학 관련 강의를 국내 최초로 개설했고 5년 뒤 여성학 석사과정을 도입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의 여성학은 당대 사회적 환경 속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1980년대는 여성주의 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시기다. 이전 여성단체가 여성들의 단순 친목모임이거나 여성지위향상운동을 하는 데 그친 반면, 1983년 발족한 여성평우회는 남녀 간 성차별문화를 타파하고자 활동했다. 여성운동이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의 변화를 도모하는 총체적 운동이 돼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다.

본격적인 여성주의 운동의 시작과 함께 한국 여성학은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처해있는 여성’에 주목해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은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차별받고 억압받을 수밖에 없는 약소자 집단에 불과했다. 잔존해 있던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여성의 권리를 언급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 당시에 여성 권리신장을 주장한 여성학에 대한 대학 내외의 관심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후 여성학 관련 강의도 여러 대학에 개설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대학생들은 여성학 관련 강의를 들으며 세미나를 했고, 총여학생회와 같은 여성주의 단체들도 비슷한 시기에 생겨났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대학 내 여성학 강좌 및 수강생은 급격히 줄고 있다. 서울대의 경우 2004년에 26개 강좌가 개설돼 1,161명이 수강했으나 2007년에는 30개 강좌에 571명만이 수강했다. 서강대는 2002년에 14개 강좌가 개설돼 1,012명이 수강했으나 2006년에는 7개 강좌에 287명밖에 수강하지 않아 2002년에 비해 75%가 줄었다. 불과 3~4년 만에 서강대는 절반 정도의 강좌가 폐강됐으며 서울대를 포함한 대부분 대학의 여성학 관련 강좌 수강생 수는 반 이상 줄었다. 김민성씨(독어교육과·07)는 “일부 학생들은 여성학을 깊이 공부하는 것 같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여성주의나 여성학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 그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일부 대학에서는 여성학과가 폐지되기도 했다. 2004년 서울여대에 이어 2007년 숙명여대가 여성학 협동과정을 폐지해 당시 여성학계와 언론의 많은 우려를 낳았다. 당시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은 여성학 협동과정 폐지 이유에 대해 “입학생과 재학생 수가 적어서”라고 밝혔다. 하지만 손승영 교수(동덕여대·여성학과)는 “숙명여대가 강조하는 여성리더십이 단순히 취직을 위해 능력을 쌓는 것만 일컫는 게 아니길 바란다”며 “진정한 여성리더십은 사회생활을 하며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성차별적 상황 등 여성과 관련된 모든 부분을 포함해야 한다”고 여성학 협동과정 폐지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줄어드는 관심, 학제성과 인식변화 때문=일각에서는 최근 여성학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이 여성학의 학제적 성격 때문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나영 교수(중앙대·사회학과)는 “많은 학자들이 여성학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기존 연구영역에 여성을 더함으로써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여성’ 지식을 생산해 왔다”고 지적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각 학문영역에 접근할 때 여성의 시각만 들어가면 여성학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러 학문이 여성학의 관점을 끌어들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여성학의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학 협동과정 주임 배은경 교수(사회학과)는 “서울대를 비롯한 몇몇 학교는 각 학과에서 여성학자들이 전문적으로 여성학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 대학의 경우 여러 학문분야의 학자들이 단순히 ‘여성’을 더하는 식으로 연구 및 강의에 접근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배 교수는 “이런 현실 때문에 여성학 관련 강좌 수강생들의 다양한 욕구를 효과적으로 채워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여성학의 학제성이 야기하는 문제는 기존 학문 영역의 틀을 벗어나되 전문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여성학은 각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젠더와 관련된 사회문제를 발견하고 연구한다. 복잡한 사회적 관계 속에 얽혀 있는 여성과 남성의 현실에 단일한 분과학문의 틀만으로 접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나영 교수는 “여성학이라는 프로젝트는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여성주의적 지식을 생산해 내는 것”이라며 “여성학은 기존 분과학문의 틀을 깨는 학제적 성격을 가진 분과학문으로 정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학을 강제적으로 분과학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입장도 있다. 조순경 교수(이화여대·여성학과)는 “여성학은 기존의 학문체계로부터 ‘학문’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기존의 학문체계를 넘어서야 하는 여성학의 과제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학문체계의 틀을 어쩌면 더욱 순응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배은경 교수는 “요즘 추세를 보면 기존의 학과보다는 협동과정 등 다양한 형태로 연구활동이 전개되고 있다”며 “여성주의 연구를 원하는 인적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전임교원이나 연구원 등을 확보하는 안정적 체제가 우선시 돼야한다”고 말했다.

젊은층의 성에 대한 인식 변화도 여성학에 대한 관심을 저하시킨 또 다른 요인이다. 요즘 20대 젊은층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고 생각하고 맞벌이를 당연시하는 등 사회의 상당부분에서 이미 남녀평등이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배은경 교수는 “남녀평등 사상이 정착되면서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는 여성을 강조한 여성학의 초기 성향만을 알고 있는 젊은 세대는 여성학이 제기한 문제가 이미 해결된 것이라 생각해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분석한 후 “하지만 요즘 여성학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나영 교수는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경쟁 격화로 인해 ‘스펙’을 쌓는 데만 몰두하는 학생들에게 여성학의 필요성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여성’에서 ‘젠더’로=여성학에 대한 부족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여성학은 40여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학문 내외적으로 많은 논의를 이끌어 냈다. 또 한국 여성주의 운동 발전에 이론적 자양분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서울대 여성학 협동과정은 내년에 남성성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여성학은 더 이상 여성만을 위한 학문이 아닌 것이다. 한국에서도 ‘젠더’ 혹은 ‘젠더학(Gender Studies)’이 기존 ‘여성학(Women’s studies)’을 대체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젠더’는 성별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던 ‘섹스’를 대체하고자 제안된 용어다.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이  주장하는 젠더는 남녀차별적인 섹스보다 대등한 남녀간의 관계를 내포한다. 이처럼 여성학은 특정 성만 옹호하는 입장의 학문이 아니다. 배은경 교수는 “여성학의 정체성은 젠더 체계의 억압성을 문제 삼고 해결하려는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에서 나온다”며 “기존 사회관계를 그대로 둔 채 여성만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편협한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2008년 현재 한국 여성학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여성성만이 아닌 남성성으로도 눈길을 돌려 사회구조에 잠재된 억압의 고리를 끊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또 한국 여성학은 아시아권 학자들과 협력해 지금, 우리의 시간과 공간에서 겪는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이론을 정립해 가고 있다. 사회적 남녀관계는 매시간 새롭게 구성되고 있으며 한국 여성학 또한 새로운 시각으로 변화하는 우리들의 관계를 주목하고 있다.

서종갑 기자  shymissoni@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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