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루쉰, 「추도」(1925)

삽화: 안하영 기자

1925년에 쓰인 루쉰(魯迅)의 단편소설 「추도」는 놀라운 작품이다. 중국의 첫 번째 현대소설이라고 공인되는 단편소설 「광인일기」를 1918년에 발표하면서부터 1936년에 타계하기까지 루쉰은 1편의 중편소설과 32편의 단편소설을 썼는데, 그중 많은 작품들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도 현재적 맥락에서 의미 있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거니와, 그 놀라움이 가장 큰 작품이 바로 「추도」가 아닐까 싶다. 필자는 최근 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작품을 다시, 그리고 자세히 읽으면서 이 작품의 놀라운 면모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면모를 지금까지 좀체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주로 필자의 우둔함 탓이리라.

이 작품의 중국어 원제는 ‘상스(傷逝)’이다. ‘상스’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다’라는 뜻의 중국어이니 우리말로는 ‘추도’ 혹은 ‘애도’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누가 누구를 추도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작품을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 남성 인물 쥐엔성(涓生)이 죽은 여성 인물 즈쥔(子君)을 추도한다. 봉건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시기, 그러나 여전히 봉건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강세인 1920년대에 쥐엔성과 즈쥔은 근대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추구하는 젊은 남녀이다. 가출한 즈쥔이 쥐엔성과 동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기쁨과 의미로 충만했던 그들의 동거는 점차 고통과 무의미로 바뀌어 간다. 일상이 그렇게 만들고, 봉건적 환경이 그렇게 만든다. 그들의 동거는 사람들에게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 때문에 쥐엔성이 직장에서 쫓겨난다. 이제 극심한 생활고에까지 부딪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쥐엔성의 즈쥔에 대한 감정이 변해 간다. 처음에는 실망으로, 나중에는 이 모든 고통이 즈쥔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결국 쥐엔성은 즈쥔에게 헤어지자고 제의하고 그 제의를 받아들인 즈쥔은 집으로 돌아간다. 즈쥔과 헤어진 뒤에도 쥐엔성의 생활은 호전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쥐엔성은 즈쥔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한동안 방황하던 쥐엔성은 즈쥔을 추도하며 수기(手記)를 쓴다.

그러나 위의 소개는 시간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다시 정리한 것일 뿐, 이것이 이 작품의 진정한 내용인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쥐엔성이 쓴 수기라는 형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쥐엔성이 일인칭 화자로서 모든 것을 서술한다. 쥐엔성이 수기를 쓰는 목적은 무엇인가?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망각’이, 즉 즈쥔과의 일에 대한 망각이 필요하다. 왜 망각이 필요한가. 즈쥔에 대한 죄책감이 그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쥐엔성의 추도는 망각을 위한 추도다.

쥐엔성의 회상은 일단 정직하다고 할 수 있다. 즈쥔과의 동거시 쥐엔성의 마음의 변화는 실은 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비겁한 합리화였는데, 쥐엔성은 그 마음의 변화를 당시에 있었던 그대로 서술하고 묘사하는 것이다. 죽은 즈쥔을 추도하면서 쥐엔성은 “그녀의 면전에서 나의 회한과 비애를 이야기하며, 그녀의 용서를 빌어 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정직한 수기 쓰기가 바로 그 “용서를 빌어 구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수기를 쓴 쥐엔성은 이제 ‘망각’을 거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쥐엔성이 즈쥔을 망각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다. “나는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뎌야만 한다. 나는 진실을 마음의 상처 속에 깊숙이 감추고 묵묵히 전진해야 한다. 망각과 거짓말을 나의 길잡이로 삼고서…….” 이 진술은 반어, 아이러니가 아닐까. 결코 망각할 수 없다는 말의 반어적 표현이 아닐까. 이 진술이 직설이라면 쥐엔성의 정직한 회상은 사실은 계산된 정직, 전략적 정직인 것이 되고 쥐엔성의 수기 전체가 허위와 교활로 충만한 것이 될 터이다. 필자에게 이 진술은 아이러니로 보인다. “나는 즈쥔을 결코 망각할 수 없다, 망각하지 않겠다”라고 진술하는 것과 이 작품에서처럼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다. 이 아이러니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쥐엔성이라는 근대 지향적 남성 주체의 딜레마다.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그리고 허위와 진실 사이에서 순진한 형태의 택일이 불가능한 그런 딜레마. 마치 루시앙 골드만이 소설을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한다”고 정의한 것처럼, 그 딜레마가 진실이라면 그것은 아이러니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추도」는 페미니즘 비평이 활발해진 뒤로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거기에서 빈번히 지적되는 것은 루쉰의 남성중심적 시각의 한계다. 특히 여성 인물 즈쥔의 시점이 완전히 배제되고 그녀의 내면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점이 비판의 유력한 근거가 되어 준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루쉰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그 한계에 대한 엄혹한 자기 인식, 그리고 그것의 정직한 형태적 표현인 것이 아닐까. 즈쥔의 시점과 내면은 그것이 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독자에 대해 한층 더 큰 심문의 힘을 행사하는지도 모른다. 또, 작가 루쉰과 작중 인물 쥐엔성을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되는 비판을 종종 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작중 인물 쥐엔성은 분명히 작가 루쉰의 분신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아이러니가 보여주는 것은 쥐엔성=루쉰의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쥐엔성=루쉰의 딜레마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다. 필자는 이 치열한 자기 성찰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20년대의 인간보다 오늘날의 인간의 내면이 더욱 복잡하게 오염되고 왜곡되어 있을 것임이 분명한데,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문학이 그만큼 치열한 자기 성찰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중어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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