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과
미국 대선은 새삼 연설의 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방송은 오바마 당선자와 그 이전의 케네디 대통령,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명연설가 특집을 내보냈고, 사회적 갈등과 경제위기에 마음이 무거운 우리는 역사 속의 감동적인 연설을 보며 잠시 답답함을 달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대중 연설은 가히 민주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민주정시대의 웅변가들은 청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서로 경쟁했고, ‘상대방에 대해 말하는(talk about each other)’ 형태의 연설은 칼이 아닌 말을 무기로 하는 싸움으로 발전했다. 상호 이해보다는 상대방의 약점 공략이 연설을 지배했으며, 최종 결정은 선동가의 화려한 수사에 의해 좌우됐다. 아테네가 멸망한 후 2,000년이 지나 부활한 근대 민주주의는 대의제였다. 국민과 대표를 매개하는 정치과정은 한층 복잡해졌고, 말과 정치의 관계는 ‘토론을 통한 통치(government by discussion)’의 이념 하에 더욱 밀접해졌다. 이제 토론과 심의의 절차는 민주주의 그 자체로 여겨졌다.

토의 정치는 일상의 여론 형성으로부터 공식적인 정책결정 과정에 이르는 여러 층의 절차와 제도로 구성된다. 토의는 지혜와 합의를 매개하는 과정이다. 행정부처의 공직자와 국회의원들이 ‘서로에게 말하는(talk to each other)’ 형태의 공적 토의를 전개하는 이유는 공동선의 관점에서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로운 합의를 도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론을 반영해야 한다는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대의민주주의에서의 토의는 책임 있는 대표들이 의견 교환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확장하고 변화시킴으로써 공동선에 합당한 입법 및 결정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물론 선거를 의식하는 선량이나 조급한 성과주의에 사로잡힌 관료는 반대편의 허점을 캐거나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상대방에 대해 말하는’ 형태의 사이비 토의에 빠지기도 한다.

연설은 그야말로 ‘공연’으로서 민주정치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한다. 선거 경쟁과 대중 설득은 성공적인 연설 정치를 필요로 한다. 청중의 가슴에 직접 호소하는 연설은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과정을 우회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리고 정치가와 국민의 직접적 대면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기도 한다. 연설 정치의 매력은 복잡한 매듭을 단칼에 해결하려는 유혹에 비례하여 커진다. 카리스마가 실린 단순명료한 메시지, 공감의 능력을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절묘한 기술은 거침없는 감동의 파도를 일으킨다.

이에 비해 토의 정치는 화려하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 국회와 정부 내의 토론과 심의는 다양한 이해 갈등 속에서 지루하고 답답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과정은 참여자들의 역량에 의존하여 어느 정도 합리적이라 인정될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상황 판단력, 관계적 사고, 신중함, 결과에 대한 숙고 등 면밀하면서도 종합적인 사고능력이 토의 정치의 성패를 가른다. 복잡한 이해관계, 상충하는 주장과 견해,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로 가득 찬 회색의 정치세계에서 공권력이 안정과 신뢰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공적 신뢰의 상실은 위기의 악순환을 낳는다. 공권력에 대한 신뢰는 일순간의 감동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관찰과 평가를 통해 형성된다. 토의 정치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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