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카르고

1

거리의 불빛들에 난청이 된 귀가
음률 대신 풍경들을 들려주는 밤
귓속의 달팽이가 몸을 벗고 흘러나옵니다
벌린 촉각 사이에는 진득한 풍경들이 고입니다
이 구토와 핏자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향기로운 입술들이 눈을 뜨고
붉은 혓바닥들이 죽처럼 길어지는
모자람이 없는 밤입니다


2

지붕 아래 걸린 빨간 발목들 덜렁거리고
하수구 속 달팽이는 고약한 냄새가 나지만
발목이 척척한 비둘기가 하얀 면발을 쪼는 밤
손가락 빨지
손가락 빨았지

커튼을 찢어다 치마를 해 입은 소녀들의 밤
침 흘리는 애완견은 이를 닦느라 바쁘네
내장을 썰어낸 접시와 함께 모두
손가락 빨지
손가락 빨았지

살점과 피톨들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고기를 씹는 신발들 요가스텝을 밟네
외롭지도 않은 구두들이 군무를 추는 밤
손가락 빨았지
같이 손가락 빨았지

3

제 식탁 위에는 파슬리 버터가 스민 달팽이 하나가
입을 벌린 포크의 이빨을 물컹 하고 들입니다
찌르고, 씹고, 빨고, 으깨고, 지지고, 썰고, 쪼개고, 삼키고
보세요 둥근 몸과 날 끝 사이의 세계를
흘러나온 것과 쏟아낸 것들로 흥건한 접시를
근육으로 된 손가락들의 살이 차오르는 밤
비로소 진지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내가 당신을 먹어도 되겠습니까?

시 부문 심사평

예년에 비해 수준 높아져

오생근 교수 불어불문학과

장경렬 교수 영어영문학과

오스트리아 출생 독일 시인인 릴케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충고한 적이 있다. “비록 / 그대의 목소리가 다문 입에서 터져 나오려 해도. 배우라, / 갑작스런 노래를 잊어버리는 법을. 이는 소진되고 말 것이니.” 유감스럽게도 젊은이들은 혈기에 이끌려 갑작스런 노래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대학문학상 응모작에서도 예외 없이 이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갑작스런 노래의 수준을 넘어 생각의 깊이와 언어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노래들 역시 적지 않았다. 모두 31명이 응모한 이번 대학문학상 시 부문에 대한 심사가 특히 즐거웠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전반적으로 예년에 비해 수준 높은 작품들이 적지 않아 풍성함을 느끼게 한 언어의 향연이었던 것이다.

두 심사위원이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선정해 논의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유리 구슬」(박수란)의 경우 시적 감수성은 주목할 만하지만 언어의 압축성이 부족하고 서술이 평면적이라는 점이, 「죽음의 집 1」(박희수)의 경우 진지한 시적 탐구의 자세는 높이 살 수 있지만 대상을 예리하게 보는 시선이 부족하다는 점이, 「이승」(이동우)의 경우 언어 운용의 능력은 돋보이지만 시적 형상화가 아쉽고 시적 진술의 초점이 불확실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한편, 「겨우살이」(이승윤)의 경우 언어 훈련은 돼 있으나 표현의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점이, 「어느 아침의 질식사」(윤지양)의 경우 순간에 대한 포착 능력은 있으나 언어의 밀도가 낮다는 점이, 「순천행 열차」(이승훈)는 표현력은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지만 시적 형상화가 미흡하다는 점이, 「하나의 작은 균열」(김유태)은 새로운 시적 모험의 가능성이 엿보이나 소재의 초점이 불확실하다는 점이 각각 지적됐다. 끝으로 「에스카르고」(이건승)의 경우 소재에 대한 통제 능력과 시적 주제를 밀고 나가는 솜씨가 일정 수준에 올라와 있다는 점에서, 또한 여타의 작품들도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당선작으로 올릴 수 있었다.

이번에 당선의 영예를 안은 학생을 포함해 모든 응모자들에게 갑작스런 노래를 넘어서 깊은 생각과 정제된 언어의 시 세계를 위해 가일층 노력하기를 당부한다. 시를 향한 정진, 이것이야말로 젊은이들이라면 해 볼 만한 아름다운 시도가 아니겠는가.

당선소감

이건승 산업인력개발학전공․05

제게 들킨 것들 많은데 제가 놓아버린 것들 역시 많아서 저는 지난 여름 동안 허공을 횡단하는 검정 비닐봉지, 소녀의 이마에 난 흉터, 제 허리춤에서 돋아나는 성聖 꾸란, 계절마다 반목을 일삼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리어카를 밀고 가는 할머니, 위액 범벅인 면발을 쪼아 먹는 비둘기, 단종된 공룡인형의 파란눈알, 지하철에서 코와 입을 가리던 손바닥, 반짝이며 회전하는 검정세단의 크롬휠, 내장을 쏟아내고 죽은 늙은 쥐, 버려진 명함을 건네주던 손, 잘못 전송된 문자 메시지,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현상들에 나름의 답을 내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방학 내내 중앙도서관 연속간행물실 구석에서 경전들을 탐닉했습니다. 매일 다니던 길을 여행했고 유난히 음악을 많이 들었습니다. 교회에 나가기도 했고 시를 읽기도 했습니다. 날이 가도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슬펐습니다. 감정들은 글로 자신들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시의 형태를 띠어갔습니다. 그 순간에 저는 지난 세월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저였습니다. 시를 읽을수록 제 속의 일체의 감정들은 희석되고 휘발됐습니다. 그러자 이 현상들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시는 저 자신의 장르였습니다.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고 갈 길은 멀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답은 평생 나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 머릿속의 질문들은 점점 명확해집니다. 조급하지는 않습니다. 시집을 배낭에 넣고 다니는 순간만큼은 저는 부드럽고 첨예한 리얼리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습작시를 칭찬하고 꾸짖어주셨던 문학사이트 ‘문장’의 시 게시판 운영자 이영주 시인님, 우문을 현답으로 돌려주신 천재 시인 김봉곤님, 스승이 돼준 많은 시집들 시인들, 항상 함께해주시는 물리학과 김승천 선배님, 서울교회 서울대 캠퍼스 봉사자 박성범 형제님, 계속 공부하도록 도와주시는 산업인력개발학전공 교수님들, 심사해주시고 상을 주신 오생근, 장경렬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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