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아버지와 나


1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만약’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말을 건넨다면, 당신은 조금 긴장하는 편이 좋겠다. 사람들은 주로 꺼내기 어려운 말이나 상대의 답변에 따라 자신의 상황이 변할 수 있는 곤란한 질문을 할 때 만약이라고 말하니까. 만약 내가 네 애인을 좋아한다고 하면 넌 어떨 것 같아? 만약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다면 넌 누구와 살래? 만약 제가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면 어쩌시겠어요? 만약 그 때 엄마의 곗돈을 가져간 사람이 형이라면 어쩌실 거예요? 이런 질문들의 진짜 의미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들은 일종의 진실 고백이다. 나는 네 애인을 좋아한다. 나의 자식아, 엄마는 아빠와 이제 그만 갈라서련다. 저는 학교를 그만 두고 싶습니다. 엄마, 그 곗돈을 가지고 튄 사람은 형이에요. 이런 뜻하지 않은 고백을 받은 당사자는, 답하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일 필요가 있다. 자신의 대답에 따라 앞으로의 상황은 예상치 못한 물꼬를 앞세우고 거침없이 흘러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내 애인을 좋아한다면 나는 네 살가죽을 벗겨 63빌딩에 거꾸로 매달아 놓을 거야. 두 분이 이혼하신다면 전 그냥 일찌감치 독립하겠습니다. 엄마는 네가 자퇴하는 꼴을 보느니 너를 정신병원으로 전학시킬 거란다, 물론 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귀찮은 내색 않고 기꺼이 한 번 더 전학수속을 밟아 줄 용의는 있다. 그 때 그 곗돈 말이냐? 형을 좀 불러오너라.
엄마가 죽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우리 집의 월요일 아침 풍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다. 잠과 술에 취한 엄마가 월요일 아침 식탁 풍경에 있었던 적은 없었으니, 엄마가 보이지 않는 한 주의 시작이 그리 허전하지는 않다. 식탁 위에는 월요일 아침 메뉴인 당도 77퍼센트의 초코 브라우니와 초코 우유가 두 개씩 놓여있다. 식탁에 앉아 있는 건 아빠와 나 둘뿐이다. 아빠는 늘 월요일 아침이야말로 사람에게 당분이 가장 필요한 때라고 강조한다. 엄마는 살아있을 적 요리를 하지 않았다. 지금은 죽었으니 혹시 어딘가에서 월요일 아침 식탁을 차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빠가 빨대를 꽂아 건네 준 초코 우유를 깊게 들이 마신다. 검은 단맛에 조금 남아 있던 잠의 부스러기들이 달아난다. 기상예약 설정이 되어있는 텔레비전에서는 생방송 아침 정보 프로그램이 한창이다. 오늘 서울지방의 최고 낮 기온은 영상 28도가 될 것으로 보이고(오늘 체육 수업이 있는데 덥겠네. 곧 가을인데 왜 이리 덥지?), 오후 한 때 구름이 낄 것으로 예상되며(비는 안 오려나?)……. 내가 등 뒤의 기상 예보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아빠는 내 접시에 놓인 초코 브라우니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나는 아빠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어 바람을 만들어냈다. 고르게 정돈된 아빠의 앞머리가 내 손바람 덕에 잠시 살랑거렸다. 그리고 아빠가 말했다.
“만약 아빠랑 아버지랑 너랑 이렇게 셋이 같이 살면 어떨 것 같아?”

2

엄마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이 온 것도 월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인데……. 이런 월요일 아침들은 솔직히 조금 버겁다. 나는 아빠의 ‘만약’발언에 대답하기 전에 조금 뜸을 들이기로 했다. 그래, 일단은 학교에 가자.
“월요일부터 체육시간이라니 짜증난다. 으아, 게다가 더워.”
운동장에 나갈 준비를 하던 선미가 머리를 고쳐 묶으며 투덜댔다. 교실 벽의 시계를 보니 어느새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내가 꺼내 놓았겠지만 꺼낸 기억은 없는 국어책이 펼쳐져 있었고, 기특하게도 간단한 필기까지 되어있었다. 참나, 정신이 없다.
“운영아, 너 오늘 따라 왜 그렇게 멍해? 아침은 먹었어? 아, 우리 엄마가 너 놀러 오라는데, 오늘 우리 집 갈래?”
엄마가 죽은 이후 선미는 부쩍 내게 신경을 쓴다. 구청 사회복지과에서 일한다는 아줌마의 영향 때문인지 선미는 유난히 정이 많다. 착한 녀석이다.
“나 안 멍하거든요? 아, 오늘은 안 되고 다음에 놀러갈게.”
선미는 아쉬운 듯 입을 삐쭉이며 장난스레 내게 팔짱을 껴온다. 나는 그런 선미의 팔을 과장된 몸짓으로 뿌리치며 웃는다. 선미도 따라 웃는다. 운동장의 수심을 높여 나가고 있는 늦여름의 햇살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선미 덕분에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오늘은 달리기 수업이다. 달리는 건 그냥 달리면 되는 거지 무슨 수업까지 필요한가 할지 모르지만 달리기만큼 기본 지식이 중요한 종목도 없다. 니네가 하는 건 뜀박질이지 달리기가 아니란 말이다. 알아듣겠나?”
하는 말마다 끝에 꼭 ‘알아듣겠나’를 붙이는 탓에 별명이 ‘알아’인 체육 선생님은 한때 소년전국체전에서 100미터 육상 동메달을 땄었다고 한다. 달리기를 좋아하다 못해 숭배하는 체육 선생님은 언젠가 내게 다가와 ‘어머님이 달리기를 좋아하신다며? 혹시 학교 다니실 적 육상을 좀 하셨나?’라고 진지하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학교에 찾아온 학부형들이 우스갯소리로 섞는 엄마의 기행 이야기를 귀 너머로 얼핏 듣고 난 후 내게 관심이 생긴 모양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말로 얼버무렸고, 체육 선생님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십 년 전 쯤 폐부된 육상부를 부활시키고 싶어하는 체육 선생님에게는 육상의 가치를 아는 열혈 학부형이 절실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가 좋아한 건 육상이라기보다는 만취 상태에서 달리는 일이었다. 엄마는 술도 좋아하고 달리기도 좋아했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건 술 먹고 달리기였다. 내가 상식의 눈으로 엄마의 생활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여덟 살 이후로, 엄마는 꽤 자주 달렸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높은 구두를 신은 채로, 때로는 맨발로도 달렸다. 술 냄새와 땀 냄새에 절어 들어온 엄마는 애꿎은 내 볼을 꼬집곤 했다. 그리고 보일러의 온수 버튼을 누르며 엄마의 목욕 준비를 도와주는 아빠의 등에 대고 ‘이렇게 땀을 쫙 빼고 나면 다시 스무 살이 된 것 같아’라고 말했었다. 아빠는 뭐라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그런 엄마를 알 것 같다는 듯한 표정으로 슬며시 웃곤 했었다.
스타트 자세 시범을 보이는 체육 선생님의 엉덩이가 하늘을 향한다. 아침 식탁에서의 일을 족쇄처럼 발에 매고 학교에 온 탓인지 땅에서 발을 내딛기 힘들었고, 속까지 더부룩했다. 순수하기에 오히려 저돌적인 아빠의 말은 내 귀를 타고 들어와 달팽이관을 지나 식도로 들어오는 어디쯤에서 더 이상 추락할 힘을 잃은 채 주저앉아 그대로 곤충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뱃속에서 기어 다니며 내 속을 뒤집어 놓는 그 느글거림에 머리까지 폭발해버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굳이 참관 허락을 받고 연약한 척 벤치에 앉아 구경만 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운동화 끈을 다시 조여 맸다. 고백하자면 나는 사실 달리기를 꽤 좋아한다.

3

그리고 나는 아빠를 사랑한다.
태어난 이후로 난 단 한 순간도 아빠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아빠의 품에 파고들면 아빠는 강아지를 쓰다듬 듯 내 머리카락 위를 손으로 훑어준다. 아빠에게서는 섬유유연제와 아이보리 비누냄새, 사과향이 조물조물 버무려진 달콤한 향이 난다. 엄마는 설거지와 청소와 빨래와 요리를 싫어했다. 하지만 우리 집은 늘 깨끗했다. 살림하기 좋아하는 아빠 덕분이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종종 소리를 지르곤 했다.
“징그러운 자식, 이제 그만 좀 꺼져.”
엄마가 아빠에게 원인 모를 투정을 부릴 때마다 나는 아빠의 손을 붙들고 한참이나 엄마를 노려보기만 했다. 어리던 내 눈에 비친 그런 엄마의 모습은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엄마가 아빠에게 악을 쓰거나 욕을 하는 일이 드물어졌는데, 그 이후로 집안은 꽤나 평화로워졌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엄마는 간간이 유지되던 작은 보습 학원에서 중학생들에게 사회를 가르쳤었다. IMF 덕분에 그 학원은 미련 없이 망했고, 그 이후 죽는 날까지 엄마는 학습지 교사였다. 학원이 망하던 날 엄마는 술에 취해 원장 아저씨에게 업혀 돌아왔다. 아빠와 엄마의 대학 선배라는 원장 아저씨는 나를 볼 때마다 얇은 지갑을 털어 용돈을 주곤 했었는데, 그 날 밤에는 ‘아저씨는 이제 고향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을 거야. 언제쯤 다시 운영이를 볼 수 있을까’라며 나를 안아 주었다. 엄마는 돌아가려는 아저씨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이렇게 왔는데 술 한 잔 더 하고 가, 형’이라며 떼를 썼고 아빠는 어느새 부엌에서 안주거리를 챙기고 있었다. 엄마는 기어이 아저씨를 거실에 앉히더니 방에 들어가 옛날 사진첩을 죄다 끌고 나왔다. 그리고는 사진첩들을 뒤적이며 아빠와 아저씨에게 ‘그치, 옛날 생각나지?’ 혹은 ‘야, 이때가 언제야. 나는 이때보다 지금이 더 예뻐’등의 술주정을 늘어놓았다. 나는 엄마의 낡은 사진첩이 신기해서 아빠가 정해 놓은 취침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났지만 엄마 곁에 굳건히 자리를 틀고 있었고, 다행히 아빠도 묵인해 주는 눈치였다. 엄마와 엄마 동창들의 사진들을 보던 나는 ‘아빠는? 아빠 사진은?’이라고 물으며 엄마를 쳐다봤고, 엄마는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로 웃으며 ‘그래, 같이 찾아보자’라며 사진첩을 좀 더 빠르게 넘겼다. 몇 장 정도 넘겼을 때 사진 대신 신문기사가 스크랩된 페이지가 나왔다. 거기에는 양 팔을 경찰에 붙들린 채 고개를 돌려 소리를 지르고 있는 어떤 남자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지훈 형이네. 운영아, 아빠 사진 찾았다.”
하지만 그 신문 사진 속 남자는 아빠가 아니었다. 아빠보다 더 키도 크고 눈도 작은 사람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분명 아빠가 아니었다. 나는 확신에 찬 소리로,
“엄마, 이 아저씨는 아빠가 아니야.”
라고 말했다. 그 순간 원장 아저씨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며 일어섰고, 아빠는 원장 아저씨를 배웅하고 술병과 음식 접시들을 조용히 부엌으로 날랐다. 그리고 나는 아빠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나는 사진 속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아빠의 표정을 보니 왠지 오늘 밤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날이 내가 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난 날이다. 엄마의 낡은 사진첩 속에서.
아빠는 집의 온갖 것들 중에 가장 먼저 눈을 뜨고 창문, 아침 햇살, 수돗물, 밥솥, 냉장고, 가스레인지, 나, 엄마 등을 차례로 깨운다. 다음날 아침, 아빠는 초코 브라우니에 내 포크를 찍어주며 의외로 간단히 지난밤의 일들을 정리해줬다. 달디 단 식탁의 초코렛들 덕분인지, 나는 별 충격 없이 아버지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선거가 열리기 전날, 아버지는 말 잘하고 잘 뛰어다니는 귀여운 여자후배였던 엄마에게 우동과 정종을 사주었다. 구로구청이 어렴풋이 보이는 골목길에서 각자 소리를 높이며 민주화에 대한 열변을 토해내던 도중에 어느새 밤이 늦어졌고, 엄마와 아빠는 식당 옆 여인숙에서 다음날 있을 시위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행동력 있는 아버지와 사고력은 뛰어나나 술에 취한 엄마가 구로구청을 점거하기 위한 모의를 하는 도중 생겨났다. 다음날 잠들어 있는 엄마의 목 위로 보풀이 가득 일어난 낡은 이불을 끌어 덮어준 아버지는 술이 덜 깬 상태로 시위대 틈에 파고들어 이런저런 구호들을 소리 높여 외치다 자신을 끌어내려 달려든 7급 공무원 두 명을 떨쳐내려 두 팔을 휘저었고, 그 둘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중 한명이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시위대 대부분은 집시법 위반과 공무집행방해죄로 의정부교도소에서 6개월 남짓을 보낸 후 세상에 나왔지만, 아버지는 살인 미수죄로 여태껏 감옥에 있다. 그 사진이 찍힌 날, 엄마는 싸구려 여인숙에서 오랜만에 흐드러지게 늦잠을 자고 지끈한 머리를 차가운 사이다로 헹군 후에야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연행되는 순간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고 한다.
“경희를 부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사진 기자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그 경희가 엄마의 이름인지, 다른 학교의 이름인지에 대해서 서클 내에서 잠시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와 엄마 사이가 심상치 않았다는 것은 대부분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그 명칭의 대학과 아버지는 별 연관이 없었기 때문에 엄마의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버지가 경희를 부탁한 대상은 얼굴이 하얗고 말수가 적은 믿음직한 후배, 바로 아빠였다.
내가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아빠는 종종 내게 아버지를 자랑했다. 아빠는 아버지를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웃는 모습은 늘 멋있었고,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아빠의 손을 덥석 잡고 ‘야, 넌 우리 써클에 꼭 들어와라’고 낮고 멋진 목소리로 말했으며 써클 대면식 때는 술 냄새만 맡고도 이미 취해버린 아빠를 대신해 신고주를 석 잔이나 마셔줬다는 이야기 등을 내게 들려주었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아빠의 눈은 별을 박아 놓은 듯 반짝였다. 아빠가 그럴 때마다 엄마는 과장된 소리로 과자를 씹으며 ‘아주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내가 망부석이라도 세워 주랴? 애 데리고 아주 놀고 있네’라고 했다. 엄마가 그런 말을 해도 아빠는 별 말 없이 나를 보며 웃기만 했다. 아빠가 웃으니까 나도 따라 웃었다.
아빠가 아버지를 사랑하니까 나도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다.
아빠는 내 생일마다 내게 예쁜 원피스를 입히고 내 사진을 찍곤 했었다. 내 생일이 가을이었기에 사진의 배경은 아파트 화단의 단풍나무나 대공원의 벤치 위였다. 아빠는 ‘웃어봐 운영아’, ‘고개를 조금 더 이쪽으로 갸우뚱하게 해봐, 그래 옳지’라며 내게 이런저런 지시를 했고, 나는 늘 군말 없이 아빠의 렌즈에 대고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귀여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빠는 해마다 찍은 내 사진을 현상해 사진 뒷면에 ‘운영이(다섯 번째 생일, 어린이 대공원 원숭이 우리 앞)’식의 제목을 붙여 아버지에게 보냈던 것이다. 물론 편지도 동봉되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아마도 ‘경희는 잘 지내요. 운영이는 이번 가을 운동회에 반대표로 계주로 출전하게 되었어요.’ 등의 행복한 가족의 소소한 일상사였을 것이다.
아빠는 자신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사람이었다는 지훈 형의 지령대로 경희를 책임졌다. 아버지가 아빠에게 경희를 부탁한 그 날 이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빠와 엄마가 결혼을 하고 굴렁쇠 소년의 힘찬 발걸음으로 올림픽이 시작되었으며, 내가 태어났고 사회주의가 붕괴되었다. 아들의 비정상적 곱상함에 대한 걱정으로 점집과 절집을 번갈아가며 다니다 결국 교회 문턱까지 말을 들여놓으려던 할머니는 아빠가 경희를 집에 데려온 날, 버선발로 마당에서 춤을 췄다고 한다. 그 때 배경 음악은 ‘찹~싸알~떡’이었다던가. ‘며늘아기 될 애 앞에서 체통머리 없이 저 할망구가 노망이 들었나보다’라며 호통을 치던 할아버지도 대학물까지 먹었다는 예비 며늘아기가 뱃속에 손주까지 데려 왔다는 걸 알고는 ‘니가 아주 숙맥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고추 값은 하는구나’라며 역시 마당에서 춤을 췄다고 전해진다. 손주는 딸이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무렴 어떠냐 싶었을 것이다. 부족하지 않은 집안 살림에 딸 둘을 낳고 얻은 막내아들이 곱상한 얼굴로 색기를 흘리고 다니는 모양새가 수상하다며 수군거리던 동네 입방정들이 잠재워지는 것만으로도 집안의 경사였을 것이다.
학원에 나가 애들을 가르치다가 학원이 망하자 아예 학습지 교사가 되어 나름 열심히 먹고 살려는 며느리는 돈 한 푼 벌어오지 않고 살림에만 몰두하는 정신머리 없는 아들에 대해 불평 한 마디 없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는 생전에 두세 달에 한 번씩 반찬과 내 옷 등의 선물을 앞세워 이따금 우리 집에 들렀다. 하루 전쯤에는 늘 미리 전화를 해 언질을 주었기 때문에 엄마는 출근길에 엄마 방을 깨끗이 정리해 손님방으로 둔갑시키고, 화장품과 옷가지들을 익숙한 손동작으로 아빠 방으로 옮겼다. 할머니는 자신의 무릎을 베개 삼아 나를 눕히고 귀를 파주곤 했다. 그리고 종종 물었다. ‘영운이 엄마랑 아빠는 요즘 같은 방에서 지내?’ 나는 할머니가 허연 때를 벗기고 보기 좋게 늘어놓은 샛노란 귤 조각을 누운 채로 열심히 씹으며 ‘응, 사이좋게 손까지 잡고자’라고 버젓이 거짓말을 해댔다. 나는 거짓말이 종종 근사한 정답으로 둔갑한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이미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진짜? 손까지 잡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물었고 나는 귀 속을 윙윙 돌고 있는 하얀 솜뭉치에 몸을 움찔거리며 ‘응, 진짜야’라고 대답했다. 우리 집을 나서는 할머니의 얼굴은 기뻐보였다. 오늘도 성공이라는 뜻이다.
엄마는 아버지가 의정부구치소로 잡혀간 그 날, 구로구청 앞 도로를 시원하게 달리지 못해서 그런지 그 이후로 늘 답답한 기분이라고 언젠가 말했다. 모두들 달리고 소리칠 시간에 낡은 여인숙의 비릿한 방에서 발에 걸리는 술병을 걷어차며 코를 골며 자던 엄마는 더 이상 광화문 앞을 달리지는 않는다. 대신 할아버지가 선산을 팔아 사준 32평짜리 아파트 근처의 한강변을 달린다. 일하지 않는 아빠와 인기 없는 무능한 학습지 교사인 엄마였지만, 성실한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가난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 우리에게 돈을 남겼다. 할머니는 나를 복덩어리라고 불렀고, 엄마는 종종 나를 보고 ‘너는 미처 예측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 민주화의 부작용’이라는 말을 내뱉고 씁쓸히 웃곤 했다. 누군가에겐 복이자 누군가에겐 부작용이라 불러졌던 불과 몇 년 전의 유년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그 때의 엄마와 할머니는 최소한 살아있었으니까.
한 달 전 쯤 아버지의 가석방이 결정된 날, 엄마는 일찍 귀가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엄마는 훨씬 아름다웠고 동시에 낯설었다. 아버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아빠의 설레는 미소와 왠지 쓸쓸해 보이는 엄마의 표정 사이에서 내 마음은 갈 길 모른 채 갈팡질팡 거렸다. 그래도 왠지 그 날 만큼은 엄마의 편이 되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열시쯤 침대에 누웠지만, 열두시가 넘도록 꿈을 꾸지 않고 버텼다. 굿나잇 인사를 하고 내가 방에 들어간 후 정확히 두 시간이 지난 후 아빠가 방에 들어와 내가 이불을 걷어차고 있는 건 아닌지, 잠이 잘 들었는지 확인한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침대 옆 푸우 탁상시계의 형광 시침과 분침이 열두시에서 만나기 위해 조금씩 서로의 간격을 좁혀 나가고 있는 걸 멀뚱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숨을 죽이고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잠자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숨소리는 가능한 곧고 규칙적으로 내뱉고 이따금 쌔근쌔근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도 했다. 내가 진짜 이렇게 자는지 나는 모른다. 난 내가 잠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텔레비전에서 본 것과 엄마의 자는 모습을 흉내 내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빠의 잠든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아빠는 늘 나보다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났으니까. 열두시가 지나자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었고 아빠는 내가 일부러 걷어차 놓은 이불을 끌어다가 내 목까지 덮어주고 따뜻한 손으로 내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고야 내 방을 나갔다. 아빠 방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정확히 백까지 숫자를 센 후에 나는 곧장 엄마 방으로 향했다. 엄마는 자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엄마에게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는 조용히 엄마의 어깨를 흔들었다. 엄마는 눈을 뜨고 내 팔을 끌어당겨 나를 이불 속으로 눕혔다. 나는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엄마, 난 누구 딸이야?”
난 혼란스러웠다. 아빠도 엄마도 아버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게는 무언가 확실한 답이 필요했다.
엄마는 방금 전까지 코까지 골며 자던 사람의 목소리 같지 않은 건강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운영이는 엄마 딸이야.”
대답을 하는 엄마는 울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엄마의 허리를 껴안았다. 엄마도 나를 안아주었다.
그 날 나는 깨달았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다고. 그러면서도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게 가족이라는 것을.

4

체육 시간이 끝났다. 속은 여전히 더부룩했다. 끝나는 종이 울리자 선미가 다가왔다.
“매점가자. 내가 콜라 쏠게.”
나와 선미는 줄이 가장 짧은 자판기 앞에 나란히 섰다. 우리 앞에는 이강호가 서 있었다.
“야, 호호. 녹차 마시려고? 녹차가 피부에 좋다더라.”
이 목소리는 체육부장 강영식이다. 싸움도 잘하고 쓸데없이 여기저기 나서는 성격이라 남자 애들이 많이 따르는 눈치이다. 체육부장의 ‘밥’은 이강호이다. 강할 강, 호랑이 호. 뽀얀 흰색 피부를 가진 키 보통, 성적 보통의 아이. 이름만 보면 호랑이 기운으로 남자애들 사이를 평정하며 땀 냄새를 풍기며 나다닐 것 같지만, 그 애에게서는 늘 사과향이 난다. 이강호는 수시로 사과향 핸드크림을 챙겨 바르고, 체육시간에는 선크림을 두껍게 바른다. 약간 갈색이 감도는 머릿결도 언제나 청결하게 찰랑거리고, 노트 필기는 깔끔하다. 그런 이강호를 남자애들은 계집애라고 놀리고, 여자애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언젠가 강영식이 ‘야, 너 진짜 호모냐?’라며 이강호의 가방을 뺏어 뒤집었을 때, 그 애의 책상 위로 쏟아진 소지품들에 남자애들이 휘파람을 불었었다. 작은 휴대용 용기에 담긴 스킨과 로션, 수분크림과 보습 효과가 탁월하다는 립글로스, 기름종이와 정호승의 시집 한 권. 그 날 이후로 이강호의 별명은 호모 호랑이라는 뜻의 ‘호호’가 되었다. 물론 강영식 작품이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있는 이강호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자판기 한 쪽에 ‘이강호는 호모다’, ‘사이코 호호’ 등의 낙서가 적혀있었다. 노는 수준을 보니 딱 강영식 패거리 짓이다. 강영식은 어느새 이강호의 옆에 서서 녹차의 효용에 대해 한창 떠들고 있었다.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야, 강영식. 방금 반장 만났는데 담임이 너 찾는다던데? 너 또 누구 때렸냐? 담임이 벼르고 있다던데. 얼른 가봐.”
대충 둘러댔는데도 강영식은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서둘러 매점을 빠져나갔다. 녹차캔을 집어든 이강호도 매점을 빠져나갔다. 선미는 ‘너 거짓말이지? 강영식이 알면 가만 안 둘 텐데’라며 어느새 내 걱정을 시작했고, 나는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으로 콜라캔을 집어 들었다.
나는 이강호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걱정해 본 적도 없다. 우리 아빠도 언제나 핸드크림을 바르고 겨울에는 립글로스를 챙겨 바른다. 아빠에게서도 이강호와 같은 사과향이 난다. 사실 내가 걱정되는 건 이강호보다는 그 애의 부모님이다. 언젠가는 그분들도 나 같은 복덩어리를 원하게 될까? 다를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복덩어리가 굴러 들어와도 우리 할머니처럼 버선발로 춤을 추지는 않겠지.
빨리 돌아온다고 돌아왔는데 체육복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수업종이 울렸다. 4교시는 담임의 수업이다. 급하게 콜라를 들이키고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담임이 들어왔고 강영식도 들어왔다. 강영식은 나를 향해 ‘너 죽어’라는 입 모양을 만들었다. 나는 못 본 척했다. 출산 휴가를 마치고 올해 복직한 담임은 평소에는 무난한 성격이지만 가끔씩 다혈질로 변할 때가 있어서 별명이 ‘카멜레온’이다. 알고 보니 오늘이 변신의 그날이었나 보다. 담임은 교탁 앞에 서자마자 대뜸,
“지금이 체육시간이야? 체육복을 입고 앉아있는 것들은 뭐야? 다 나와.”
라고 소리쳤다. 체육복 차림인 사람은 나와 선미, 강영식 세 명이었다. 선미는 벌써부터 울상이었다. 우리 셋은 나란히 교탁 앞에 정렬했다.
“니들은 왜 옷 안 갈아입었어?”
담임이 말했다. 선미는 떨고 있었고, 강영식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잘 놀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체육시간 끝나고 너무 더워서 매점에 들렀어요. 죄송합니…….”
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담임의 손바닥이 내 뺨을 휘갈겼다. 나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머리가 닿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았다. 몇 초나 흘렀을까. 정적이 흐르던 내 귓가에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전철이 고가도로를 지나가는 덜컹거림 같기도 했다. 반쯤 뜬 눈으로 얼핏 본 선미는 울고 있었다.
“기절한 거 아냐?”
“야, 누가 좀 건드려봐.”
누운 채 슬쩍 본 담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머뭇거림 없이 나를 내려 친 손은 재킷 주머니에 처박힌 채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언제쯤 일어나야 좋을까 생각하며 시간을 고르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일어나는 타이밍이 중요할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눈을 감았는데, 그 순간 갑자기 코끝으로 사과향이 풍겨왔다. 사람은 이름 따라 살게 된다던데, 대체 강한 호랑이의 무엇을 닮길 원하며 쟤네 부모님은 저런 이름을 지어준걸까 싶었던 이강호와 호랑이의 공통점은 상대가 미처 예측하지 못하는 저돌성이었을까. 이강호의 뽀얀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자 이강호는 나와 눈을 맞추고 씽긋 웃었다. 이강호는 같은 듯하지만 조금씩 다른 포즈로 대강대강 굳어있는 서른 두 명의 아이들과 여전히 낭패스러운 얼굴의 담임을 꽤 남자애 같은 넓은 등으로 가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저 없이 그 손을 잡았다.
담임은 선심 쓰듯 나를 신속히 조퇴시켰다. 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담임 자신을 위해서인 것 같았다. 선미는 울먹이며 열 번이나 ‘괜찮아?’라고 물어봤고, 나는 열 번이나 ‘괜찮다’고 답한 후에 교실을 나왔다. 조퇴는 했지만 딱히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빠는 엄마가 쓰던 방을 아버지의 방으로 개조할 궁리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고, 아버지가 좋아한다던 홍합찜 요리를 연습해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행복한 우리 집을 위해서 나는 아빠의 만약 발언에 대해 모범답안을 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응, 좋아. 아빠랑 아버지랑 나랑 셋이서 행복하게 살자’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직은 자신이 없다. 해가 하늘 한 가운데로 향하고 있는 운동장을 뒤로 하고 교문을 나섰지만 나는 여전히 집에 갈 생각이 없었다.
교문 앞에 다다른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가 몸을 날린 한강에 가보기로 했다. 발을 내딛는 순간 등 뒤에서 아빠 냄새가 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이강호였다.
“너도 담임이 조퇴시켰니?”
나는 별로 놀란 기색 없이 담담하게 물었다.
“네가 걱정되어서 그냥 나왔어.”
이강호는 가벼운 몸짓으로 내 옆에 섰다. 누군가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누군가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다른 누군가는 집에서 홍합찜을 연구하고 있을 제각기 바쁜 시간에 이렇게 하릴없이 한강을 향해 걷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은 강변역 근처였다. 나는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걸었다.
묵묵히 내 곁을 걷고 있던 이강호는 인도와 차도의 경계가 애매한 길에 들어서자 슬그머니 자리를 바꾸어 나를 인도 쪽으로 밀었다. 어쩌다보니 이강호의 호위를 받으며 길을 걷는 모양새가 되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한강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이 동네만 벗어나면 한강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도 나는 더 이상 걸어 나갈 수 없었다. 엄마를 삼킨 한강. 온 몸이 물에 불어서 괴수도감에서 보았던 괴물대왕오징어 같았던 엄마에게서는 평소의 술 냄새와 담배 냄새 대신 하수구 냄새가 났었다. 아침부터 말썽이던 배가 또 시큰거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근처 아파트 놀이터의 벤치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이강호도 별 말 없이 자리를 틀었다. 머리가 웬만큼 큰 아이들은 죄다 학교에 있을 시간의 놀이터에는 머리가 주먹만한 꼬마들의 웃음소리만 감돌았다. 늦여름의 햇빛은 적당히 밝았고, 습도도 이만하면 괜찮지 싶었다. 걱정 따위는 암 것도 없을 것 같은 한창 좋을 때의 어린애들을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넋 놓고 놀이터를 바라보고 있던 사이, 그새 편의점에 다녀온 듯한 이강호가 차가운 콜라 캔을 내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뺨에 대고 있어. 아직도 빨개.”
나는 캔을 받아 들고 순순히 뺨에 대었다. 이강호가 대뜸 말했다.
“너를 보면 안심이 돼.”
우리 할머니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우리 운영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아빠도 그랬다. 나 덕분에 아빠가 행복하다고, 지훈형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다들 그렇다니, 다행이다. 결국 다행스럽지 않은 건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인가?
이강호가 말을 이었다.
“넌 다른 애들과는 달라. 네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잖아.”
나는 그건 내게 네가 쓰는 것과 똑같은 핸드크림을 쓰는 아빠가 있고, 엄마는 한강에서 대왕오징어로 변신해 승천했으며 아빠의 첫사랑이자 엄마의 동지였던 아버지가 곧 출소해 나와 아빠와 함께 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감동할 것도 고마워할 것도 없으며 무엇보다 난 지금 네 감정과 고민 따위를 친절하게 들어줄 여력이 없다고도 덧붙여주고 싶었다.
“나는 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별 다른 이유는 없어.”
나는 그냥 간단히 대답했다. 사실은 이런 날 누구라도 내 곁에 있어준다는 것이 조금은 기뻤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날 일으켜 세우던 이강호의 손은 정말 따뜻했었다.

5

우리는 콜라 캔이 미지근해질 때쯤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아무데로나 무작정 걸었다. 걷다가 힘들면 잠시 앉았고, 그러다 다시 걸었다. 그러는 내내 이강호는 내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에야 나는 집으로 향했다. 조퇴를 했음에도 오히려 하교 시간은 평소보다 늦었다. 오늘은 왠지 내 삶의 결석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는 내내 ‘응, 좋아. 아빠랑 아버지랑 나랑 셋이서 행복하게 살자’라는 말을 수백 번 연습했다. 중간 중간에 이강호가 던지는 별 것 아닌 물음들-좋아하는 색깔과 꽃 따위-에 간단하게나마 답을 했고, 일찌감치 미지근해진 콜라 캔을 따 마시기도 했다.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벽에 붙은 거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학원에 다녀오는 듯한 꼬마 애들 몇몇이 나를 무심히 쳐다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찬거리를 사들고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동네 아줌마들의 인기척도 느껴졌다. 나는 아빠 앞에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싶었다. 스티커 사진을 찍을 때처럼 2초에 한 번꼴로 표정을 변화하며 ‘응, 좋아’라는 말을 되뇌었다. 표정이 죄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이윽고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엘리베이터의 오름 버튼을 눌렀다. 표정이야 어떻든 나의 ‘응, 좋아’라는 답변만으로도 아빠는 충분히 기쁠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갔다. 콜라 두 캔을 빼고는 아침 이후에 제대로 먹은 게 없는데도 여전히 속이 더부룩하고 배가 아팠다. 맞은 건 뺨인데 왜 배와 머리가 아픈 건지. 거울에 비친 열 세 살짜리 여자애가 왠지 가엽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의 이동 층수가 집에 가까워질수록 온몸이 긴장되었다. 나는 긴장을 풀어볼 요량으로 몸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달리기 전에 스트레칭을 하듯이. 그러다 어느 순간, 엘리베이터 문에 달린 전신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 쳤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내 교복 치마가 붉게 얼룩져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초경(初經)이었다.
12층에 도착했다는 벨이 울리고 문이 열렸지만 나는 잠시 엘리베이터의 정적 속에 서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이 내 인생의 처음이 될 수도 있는 걸까?
오늘은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날 무언가를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 나는 조금은 두렵고 또 낯설게 느껴졌다. 엄마도 세상에 태어난 나를 처음 대면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라는 존재는 엄마와 아빠와 아버지에게 인생의 처음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마지막이었을까.
나는 축축하고 비릿한 엉덩이를 뒤뚱이며 집으로 향했다. 어쩌면 나는 한강물에 불어버린 엄마의 마지막을 보았던 순간부터 아빠와 아버지와 내가 새로운 가족이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태어난 1988년에 우리나라는 성공적으로 올림픽을 끝마쳤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2000년에는 Y2K도, 인류의 종말도, 우주의 폭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민주화 시대도, 밀레니엄 시대도 우리는 모두 안전하게 맞이했다. 무언가가 시작되고 변화할 때마다 사람들이 떠안고 지내던 걱정들은 지나고 보니 사실 별로 대단치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아빠와 아버지와 나도 괜찮을 것이다.
술이 덜 깬 채 구청 공무원 둘을 밀어버린 후 ‘경희를 부탁한다’는 지령을 남긴 채 14년을 견뎌 낸 아버지, 그 아버지를 사랑한 아빠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달리고 있을 것만 같은 엄마, 그리고 그 셋의 딸인 나. 어쩌면 우리들이야말로 민주화와 밀레니엄 시대에 지어진 행복한 동화의 표상, 그 자체가 아닐까? 얼룩진 교복 치마를 끌고 집의 문 앞에 다다랐다. 이 문 너머에서 아빠가 날 기다리고 있다. 나는 주저 않고 벨을 누른다. 문이 열리고 민낯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아빠의 얼굴이 나타난다.
아, 이제야 나는 내게 주어진 무언가의 시작들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 같다.
내일부터 아빠와 아버지와 나, 우리는 꽤 멋진 가족이 될 것이다.

소설 부문 심사평

‘대학문학’의 패기를 바란다

전형준 교수 중어중문학과

박성창 교수 국어국문학과

‘대학문학’이란 말이 성립된다면, 우리는 두 가지 의미가 이 말 속에 포함돼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대학’이 암시하는 젊음 특유의 패기 있는 실험정신과 ‘문학’으로서 설득력과 가독성이 그것이다. 이 두 요소가 행복하고 조화롭게 결합된 작품이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나 문학적 세련미는 떨어지더라도 패기와 실험정신이 넘치는 작품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심사를 시작했다. 물론 작품으로서 완성도는 미흡하지만 뛰어난 실험적 성취를 보인 작품이라고 할 때, 이는 글쓰기로서 기본을 갖추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문학의 첫걸음을 뗀 대학생에게 글쓰기의 기초를 다지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 두 심사위원은 이러한 기준들을 염두에 두면서 투고된 14편의 작품을 놓고 고민한 결과 「아빠와 아버지와 나」를 우수작으로 선정했다.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안정되고 잘 짜여진 구성 위에 무엇보다도 탄탄한 주제의식을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아빠’와 ‘아버지’를 대립시키고 교차시키면서 ‘나’의 시선이 갈등에서 조화로 이행해가는 대목에서 1980년대와 2000년대, 기성세대와 요즘의 세대를 서로 만나게 하려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에 관한 자의적 설정 등 몇 가지 결함 때문에 이 작품을 대상으로 추천할 수 없었다. 「윙티로안 쌀국수」는 음식을 소재로 다문화주의의 현실을 담아낸 재치 있는 작품이다. 가독성과 작품으로서 설득력은 있지만, 풍자나 비판 같은 소설적 장치가 부재한 까닭에 전반적으로 우화나 동화의 느낌이 강해서 가작으로 추천했다.
‘젊은’ 문학은 자기 표현과 내면 고백의 강한 욕구를 보여준다. 그러나 내면의 고백이 독백의 형식으로 이뤄져서는 안된다. 투고된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기 표현의 절실함이 소통을 위한 노력과 어우러지지 못한 아쉬움을 준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일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서술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소설은 이야기이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이야기이지만 타인과 사회에 대해 열려 있을 때 그 진정성을 확보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당선소감

더 많이, 더 오래 읽고 싶다

김주미 경영대학원 석사과정·7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주님의 뜻이었다. 감사드린다.

너무나 이기적으로 청춘을 누리고 있는 딸에게 언제나 과분한 사랑을 내주시는 부모님, 침대 밑에 악어가 있다고 칭얼대던 꼬마였는데 어느새 자라 법전을 펼치고 앉아있는 동생 주영에게 깊은 사랑을 표한다.
관악의 58동에서 꼬박 여섯 해를 늙어버렸다. 새삼스레 그동안 나를 스쳐지나간 모든 이들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리고 어리석던 나 때문에 내 곁의 그들이 때때로 지치고 지겨웠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다. 경영대학 교수님들, 특히 석사과정 동안 지도해주신 이동기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처음이었다. 내 입맛에 맞는 말간 단어들을 미지근한 물로 씻어 지어낸 내 글을 난생 처음, 세상으로 내몰았다. 뜸도 제대로 들이지 못한 설익은 글이 놓인 밥상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꺼이 거두어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린다.

내 멋대로 선생님이라 칭하며 존경해 온 오정희 선생님과 신경숙 선생님의 글은 그 자체로 내 삶의 빛이자 희망이다. 몸과 마음에 멍이 들 적마다 선생님의 책을 곁에 두고 잠에 들곤 했었다. 선잠에서 깨어나 마주한 낯선 어둠에 놀라 불안해질 때마다, 잠 한숨 자지 않고 나를 지켜봐준 선생님의 글이 차가운 내 손을 잡고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두 선생님의 글을 계속해서 읽고 싶다. 더 많이, 더 오래. 그러니 부디 건강하셔서 나를 두 분의 재능에 대한 감탄과 동경과 질투로 끊임없이 번민하게 만들어 주십사 간곡히 부탁드린다.

나는 나밖에 볼 수 없던 꿈들에 늘 눈이 멀어 있었다. 세상 속의 그런 내 모습은 어딘가 어색해 보였고, 그래서 가끔씩은 부끄럽고 화가 났다. 왜 닿을 수 없는 것들에 그토록 마음을 주냐고, 나 자신을 다그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다. 내 꿈은 세상과 타협할 수 없고, 나 역시 내 청춘에 변절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런 나의 고집 때문에 나는 나날이 더 세상과 어색해질 테지만, 그 같은 세상과 나의 간극을 확인하는 매순간 나는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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