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좌담회- 새내기, 국어교육과 문학학회, 소설가 이해경

▲ © 금기원 기자

소설가 이해경씨, 새내기, 국어교육과 문학학회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첫 만남의 다소 긴장된 분위기는 이해경씨의 편안한 미소와 소탈한 입담 덕에 금세 누그러졌다. “선후배 관계이니 만큼 자유롭고 편하게 이야기합시다”라는 이해경씨의 말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좌담회에서는 개인의 경험과 글쓰기, 이 시대의 인터넷소설, 이해경의 작품 등에 대한 토론이 이뤄졌다.

삶과 글쓰기

사회자: 이해경씨는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시다 늦은 나이에 문단에 발을 들여놓으셨습니다. 대학시절에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셨는데 졸업 후에 곧바로 작가의 길을 걷지 않은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해경: 대학 다닐 때는 ‘가자라기’라는 문학 동아리 활동을 했고 주로 시를 썼었어요. 그런데 시는 점점 안 써지고 소설도 엄두가 안 나더군요.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거죠. 제 소설의 주인공처럼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자: 다른 분들은 글쓰기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정현: 누구나 창작의 욕구는 있죠. 저도 언젠가 제 인생을 글로 표현해 낼 수 있게 되면 써보고 싶어요. 하지만 아직은 자신이 없네요. 앞으로도 많이 접하고 많이 감상하고 싶어요.

이성규: 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감상도 많이 못한 것 같아요. 대신 문제집에서 수많은 작품과 만나게됐죠.(웃음) 글쓰기도 마찬가지였어요. 자발적으로 쓰기보다는 학교 숙제로 많이 썼었죠.

이연지: 요즘은 인터넷이 글쓰기의 장벽을 많이 낮춘 것 같아요. 저는 인터넷을 많이 하고, 그만큼 인터넷에 글도 많이 쓰는데 익명성 때문에 솔직할 수 있고, 리플이라는 즉각적 반응이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인터넷소설은 ‘소설’인가 - 견해 엇갈려

사회자: 이해경씨의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에서도 주인공 ‘그’의 아내가 소설을 인터넷 카페에 올리고 그에 대한 반응을 살피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요즘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글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평가도 분분합니다. 얼마 전엔 귀여니 특례입학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었죠. 인터넷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성규: 내용적의 측면에서 인터넷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적합할 것 같아요. 소설이라면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제가 본 인터넷 소설들은 천편일률적이었고 흥미위주였거든요.

김신원: 저 역시 인터넷소설을 ‘소설’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구체화된 사유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죠. 그러나 인터넷소설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문단이 나누어져 있지 않고, 대화체로만 이루어지며, 내용상에서도 정리된 사고의 흐름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요즘 소설이 다루고 있는 세계가 일생에서 일상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느낌인데 인터넷소설은 일상 중에서도 ‘순간’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아요. 이모티콘이나 대화체도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겠죠.

조정현: 동의합니다. 인터넷소설을 읽으면서 만화에서 그림만 빠진 형태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 인터넷소설이 출판되는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인터넷 상에서 인터넷소설이 존재하는 것은 ‘팬픽(팬들이 직접 쓰는 소설)’이나 ‘야오이(남성 사이의 동성 연애물)’와 마찬가지로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출판되는 것은 자본주의 논리와 연관되는 문제인 것 같아요.

성은경: 저도 동의해요. 저는 인터넷소설이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출판되는 것은 그만큼 팔린다는 의미겠지요. 특히 귀여니의 특례입학에 관련된 논쟁을 보면서 인터넷소설에 대한 견해가 너무나 다양하다는 걸 느꼈어요. 논의의 여지가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홍수봉: 그런데 장사가 잘 되기 때문에 출판해서 판다는 것이 왜 잘못인지 잘 모르겠군요. 그만큼 호응이 있다는 것 아닌가요?

“‘소설’하면 떠오르는이미지에 매여있는 것은 아닐까”

이해경: 그래요. 돈 벌려고 출판사를 만들고 인터넷소설을 출판해서 성공했는데 그것이 왜 문제일까요? 이건 개인의 기호 문제인 것 같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잘 팔리고 이런 현상이 존재하는 것이겠죠. 만약 자본주의 논리를 비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존재 근거를 부정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우리가 너무 ‘소설’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은 기존의 관념을 깨면서 발전해왔거든요. 정말 좋은 소설이라고 얘기되는 것 중에 소설이 아닌 것 같은 것도 있죠. 박상륭 선생님의 소설을 보면, 정말 소설 같지 않지만 아무도 그것이 소설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거든요. 그러니 사실 무엇이 소설이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것 같아요.

사회자: 이모티콘이나 채팅어의 사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신원: 채팅어, 이모티콘이 난무하고 그것이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문제인 것 같아요. 언어를 하나의 규약으로 볼 때, 상식이자 예의로서의 규약이 깨질 때의 불쾌감을 인터넷 소설에서 느끼는 것 같아요. 

홍수봉: 제 생각은 달라요. 이모티콘도 의미를 전달하는 하나의 새로운 방식으로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욱 효과적이라면 사용해야죠. 상식적 문체나 규약을 깨는 것, 그것도 문학의 특질 중 하나잖아요. 조선시대 박지원의 예를 보세요. 규약의 파괴가 문학과 예술의 진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성규: 인터넷 소설에서에서 삼각관계 같은 뻔한 설정은 문제점이지만, 이모티콘을 사용하고 채팅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언어파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아요. 선배님께서는 박지원을 말씀하셨지만 저는 이상이 좀 더 적절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성이 뒷받침된다면 표현방식은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언어도 사회적 소통 - ‘한글 순수성’으로 억압 말아야

사회자: 이해경씨는 소설에서 외래어나 구어체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시고, 팝송을 인용하기도 하셨잖아요. 평론가 김화영씨도 그것을 지적하셨던데 소설쓰기에서 언어의 순수성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해경: 언어에는 역사성과 사회성이 있죠. 이 중 어느 한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언어를 경직되거나 왜곡되게 바라보게 될 수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말’의 순수성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있는 것 같아요. 저는 영어든 일본어든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한국어와 섞어 쓰는 것이 상황에 자연스레 맞아든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소설에서도 그것이 상황과 분위기에 맞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섞어 썼던거죠. 물론 터무니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라면 문제겠죠.

이연지: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라면 문제라는 말씀하셨는데 외국어를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소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잖아요?

이해경: 거긴 제 주관적 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겠죠. 독자도 고려하긴 하지만 이해할 것이라 믿고 쓰는 경우가 많죠. (웃음)

차기작 『언제나 들국화처럼』‘상처’에서 희망 긷는 소설 쓸 것

사회자: 지금부터는 이해경씨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은경: 소설을 보면 사람은 그, 그녀와 같은 대명사나 M, N, L 등의 알파벳 이니셜로 불리는 반면, 물건은 ‘데이빗’과 같은 이름이 있거든요. 여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이해경: 이름에 관한 문제는 제가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이예요. 지금 제목으로 제목을 바꾸던 중에 ‘타인의 이름’이라는 제목을 생각했을 정도로 이름에 생각이 많았죠. 이것은 현실과 소설의 간극이나 불분명한 경계와도 연관됩니다. 이 소설은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잖아요. 만약 등장인물에게 구체적 이름을 부여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오히려 이상할 거예요. 대명사나 알파벳 이니셜 같은 이름이 이 소설의 분위기와 성격에 딱 어울린다는 감을 잡고 그렇게 한 것이죠.

김신원: 주인공에게 이름이 없어서였는지 저는 ‘그’에게 연민이랄까, 동질감이 더 강하게 느껴졌어요. 소설 속의 ‘그’는 타인에게 바보취급 당하고 소외당하지만 나름대로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고민과 생각이 많은 사람이죠. 하지만 남과 다를 뿐이지 바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현실에서도 소외당하고 바보취급 당하는 사람이 실은 더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해경: 제 소설을 제대로 읽으신 것 같네요.(웃음) 인간은 상처받는 동물인 것 같아요. 호모 운디드(homo-wounded)라고 할까요? 상처를 드러내느냐 아니냐, 극복하느냐 못 하느냐 뭐 이런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은 모두 상처 속에서 사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제 소설의 중요한 제재는 ‘상처’가 될 것 같아요. 다만 저는 너무 상처만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싶진 않고, 상처에서 길어내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사회자: 마지막으로 이해경씨의 앞으로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이해경: 곧 두 번째 소설이 나와요. 소외되고 상처받은, 별 볼일 없는 인간들의 사는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일단 『언제나 들국화처럼』으로 잡았어요. 제목에서의 들국화는 전인권의 ‘들국화’를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언젠가는 꼭 정통 크리스챤 소설을 써보고 싶어요.

사회자: 이로써 이해경씨, 그리고 새내기와 함께한 좌담회를 마치겠습니다. 이해경씨와의 만남이 새내기 분들과 국어교육과 문학학회 여러분께 소중한 만남으로 기억되기 바랍니다.

*이해경
서울대학교 국문과(82학번)를 졸업하고 동국대 연극영화과 석사과정을 수료한 이해경은 2002년에 데뷔소설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로 제 8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했다. 어느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의 권유에 의해 소설을 쓰게 되는 한 남자를 그린 이 작품에는 ‘소설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의식이 담겨있다.

*국어교육과 문학학회
현재 10여 명이 활동하고 있는 국어교육과 문학학회는 80년대에 생겼다. 일주일에 한번씩 세미나를 하고 있으며, 일년에 한 번 학회지를 발간한다. 

대담후기

김신원: 모든 논점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못한 것 같아 조금 아쉽지만 다양한 의견 들을 수 있어 좋았어요. 앞으로 글을 써 볼 생각이 있는데, 이번 좌담회를 계기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더 공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만의 것을 쓰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부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제 전공도 문학 관련 분야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글을 쓰고 싶어요.

이성규: 일정한 주제를 놓고 이렇게 진지하게 토론한 것도, 직접 소설가를 만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처음이었어요. 생소한 경험이었지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앞으로 소설을 더욱 많이 읽고, 생각을 정리해봐야겠어요. 전공이 독문학이니만큼 앞으로 독일작품을 많이 접하고 싶어요.

▲일시: 2004년 1월 15일(목)
▲장소: 녹두 「Nix & Nox」
▲사회·대담정리: 김수연 기자
▲사진: 금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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