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지성의 시대 | 천정환 지음 | 푸른역사 | 376쪽 | 1만6천5백원

미네르바가 구속됐다. 우리 시대의 미네르바는 새벽녘에 날아올랐다는 이유로 석양을 맞이하지 못한 채 그만 날개가 꺾여 버렸다. 미네르바의 구속은 미네르바의 출현과 같이 세간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현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는 많지만 대개는 ‘지식인’이라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미네르바는 헐벗은 대중일 뿐이었다. 「경향신문」은 지난 2007년 연재기획에서 ‘지식인의 죽음’을 선포한 바 있다. 지식인의 부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동안 대중은 아고라와 촛불집회에서 ‘대중지성’을 과시했다.

문화사학자이며 국문학자인 천정환 교수(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는 『대중지성의 시대』에서 앎의 새로운 주체로서 ‘대중’에 주목한다. 다중, 집단지성 등의 용어를 접해본 독자라면 저자가 왜 ‘대중’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는지 궁금할 법도 하다. 저자는 네그리 등 자율주의자들이 제안한 ‘다중’ 개념에 대해 “대중에 묻은 때를 피해 집합적 존재를 찾을 때 다중을 택할 수 있다. 하지만 다중은 후기 근대의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고 민중․노동계급의 의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촛불’의 주체들이 3․1운동, 4․19혁명의 주역들과 다른 존재일까. 저자는 “‘그들’이 곧 ‘우리’이며 ‘우리’가 ‘그들’”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다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하기보다는 ‘대중’에 새로운 함의를 부여하는 쪽을 선택한다.

책은 1부에서 현대 지식문화의 구도가 야기하고 있는 모순에 주목하면서 대중지성의 의의를 말하고, 2부에서는 한국 근대사에서 앎의 주체성이 어떻게 마련돼 왔는지를 살핀다. 한국근대문화사와 동시대 현실의 문화 연구를 병행하고 있는 저자는 이미 『근대의 책 읽기』에서 대중을 다룬 바 있다. 이전 책이 ‘책 읽기 문화’를 통해 대중이 근대 문화를 성취해나가는 과정을 그렸다면 이번 책은 독서나 문학 외의 영역에까지 문제의식을 확장했다. 그는 2부 ‘아래로부터의 해방과 근대적 앎의 성립’에서 풍부한 문화적 사료를 동원해 개화기 대중지성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개화기 앎의 문화적 변동은 오늘날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독립신문」과 아고라, 각각이 주도한 만민공동회와 촛불집회는 성격뿐만 아니라 그 내용까지 일대일 대응을 이룬다. 대중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정치적 상상력을 펼쳐낼 수 있었다. 두 집회는 각각 러시아 이권침탈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에 대한 조정과 정부의 굴욕적 자세를 규탄했다. 최근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대중지성’은 백여 년 전 「독립신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개화기 대중을 이끈 이들은 서구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소수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정치뿐만 아니라 문학, 과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능통했다. 하지만 지식의 분화가 뚜렷한 현대사회에서 지식인과 대중의 구분은 거의 무의미해졌다. 영문학의 지식인은 생물학의 대중이고 생물학의 지식인은 다시 영문학의 대중일 뿐이다. 저자는 “‘대중 대 지식인’이라는 관념이 불가능한 통념일 뿐이라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누구나 대중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소통’과 ‘연대’가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중이 교양과 민주주의에 관해 새로운 태도를 가질 것을 권한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대중문화의 새로운 주체로서 ‘마니아’에 주목한다. 그들은 특정 분야의 앎을 개발하고 공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동방신기 팬클럽과 MLB동호회가 참여한 촛불집회에서 저자는 정치와 문화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봤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과 달리 취향의 정치화는 아직까지 가능성으로만 비춰질 수 있다. 더욱이 마니아가 정치와 무관한 취향을 갖고 있다면 가능성은 더 줄어든다. 진중권 교수(중앙대 독어독문학과)도 대담 ‘한국의 근대성과 대중, 갈림길에 서다’(『대학신문』 1719호, 2007년 11월 5일자 7면)에서 “‘황우석 사태’ 때의 브릭(BRIC, 생물학연구정보센터)은 인터넷이 갖고 있는 집단지성의 위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항상 소수라는 게 문제다. 다시 말해 다수의 군중과 소수의 다중으로 대중이 분리되고 있다”고 말했다. 촛불집회는 정치와 무관한 취향이 정치적인 것과 연계되면서 일대 ‘사건’이 됐지만, 취향만 마냥 비대화된다면 정치적인 것은 배제될 수 있다. 마니아가 ‘히키코모리’화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니아의 가능성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마니아를 광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까지 마련했다면 이 책의 가치는 한층 더 빛을 발했을 것이다.

3․1운동부터 있었던 대중지성은 점차 무르익어가고 있다. 미네르바는 저자가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마니아적 대중’의 모습일 것이다. 미네르바는 구속됐다. 어쩌면 구속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권력이 대중의 얘기를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대중지성의 시대가 온 것인가. 헤겔도 그의 『법철학』에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깃들어야 날기 시작한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미네르바들’이 잠재해 있고, 우리는 좀 더 기다려볼 일이다. 지혜란 원래 발걸음이 느린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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