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연구, 핵무기 실험 등이 그렇듯이 과학은 윤리적 문제와 항상 맞닿아 있다. 갈릴레오처럼 통념에 맞서 과학의 진실을 말하려 한 이도 있고, 과학의 발전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부르짖은 이도 있다. 앨런 튜링과 프리먼 다이슨의 삶이 각각 그러했다. 삶은 상반돼 보이지만 두 사람의 생각은 닮았다.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승산, 2008)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 연합군의 승리를 가져오고 이후 컴퓨터를 발명한 앨런 튜링의 생애를 다룬다. 백설공주처럼 독이 든 사과를 베어 먹음으로써 생을 마감한 영국의 수학자 튜링은 동성애자란 이유로 컴퓨터 발달에 기여한 공로가 오랫동안 인정되지 못했다. 그동안 출간된 평전도 동성애를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위대한 경력에 남은 오점으로 다뤘다. 하지만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은 색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책을 쓴 데이비드 리비트는 튜링의 동성애적 기질이 컴퓨터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책을 옮긴 고중숙씨는 “리비트가 동성애자이기에 튜링과 모종의 유대감을 느낀 듯하다”고 설명한다.

튜링이 컴퓨터를 만들었을 때 컴퓨터가 인간처럼 논리를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사람들은 이 기계의 지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인간의 영혼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월하다는 통념이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도 오랫동안 정상적인 인간 집단 바깥으로 배제돼 왔다. 튜링은 동성애자를 거부하듯 기계를 거부하는 인간중심주의를 극도로 싫어했다. 때문에 그는 기계의 의식을 무시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며 기계를 옹호하곤 했다.

튜링 권위자인 앤드루 하지스는 리비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리비트가 전기 작가가 아닌 소설가로서 튜링의 삶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학이 그저 메마르기만 한 논리적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고뇌가 깊이 서려 있는 학문임을 절감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리비트의 관점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통합해 ‘다이슨 방정식’을 발표한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사이언스북스, 2009)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20세기의 역사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징집돼 폭격사령부의 작전분석가로 일했다. 그는 “폭격은 전쟁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폭격기 승무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일하고 있으므로, 나는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애써 위로한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자 그는 윤리원칙을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이때 겪었던 내면의 고뇌는 그의 여생을 계속 따라다니게 된다. 이후 그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은둔자의 미덕은 용감히 적에게 맞서지 못한다”는 존 밀턴의 문구를 인용하며 안전 원자로를 설계하고 핵무기 감축을 위해 활동하는 등 과학자로서 공적인 일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나와 관계있는 일이다”는 신조처럼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프리먼 다이슨은 “‘인간의 상황’에 대해 느낀 것들을 과학자가 아닌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과학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끌고 갈 이는 과학자가 아니라 ‘일반인’이기 때문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의 진심어린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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