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문제는 이렇다. 노점상들을 옥상으로 몰고, 아이들의 ‘차이’를 차별하며, 컨테이너를 길에 쌓고, 페인트를 사람에게 뿌리며, 특정 재판을 일부 판사에게 몰아주고, 탁월한 논객을 단순한 법률로 구속하며, 산 허물고 강을 ‘정비’하면서 ‘지속가능한’ 녹색성장을 외치는 것. 이런 낯선 이율배반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도처에서 비등함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고 또 마음껏 추진하게 하는 원동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정답: 경제. 주관식 문제치고 너무 쉬웠다면 차라리 이렇게 물어보자. ‘경제’라는 다분히 ‘정치’적인 용어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는 문제(question)가 아니라 ‘문제’(problem)가 된다. 저들에게 그 너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러니까 이게 ‘문제’다.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경제’라는 점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인간 욕망의 집적물이 아닌가. 그것으로 인해 헐벗고 굶주린 시대를 넘어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그 ‘경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열망이야말로 우리 한국사회가 겪어온 사회변혁의 근원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잘 먹고 잘 살자’는 그 ‘경제’의 철학이야 말로 모든 국가권력의 핵심논리가 될 수밖에. 어떻게 평화로움을 유지하냐는 질문에 저 동막골 촌장이 명쾌하게 답하지 않았는가. ‘마이 멕이야지, 머.’

이제 달리 말해보자. 만일 당신이 촌장의 말에 박장대소한 적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경제’의 논리가 지나치게 단순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에 비해 현실은 녹록치 않다. 앞서 말한 저 많은 이율배반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경제’라고 답했을 때 당신은 웃었는가? 누구든 웃었어야 했다. 그건 정말 ‘웃기는’ 답이기 때문이다. 저 동막골 촌장의 대답처럼.

물론 웃었어야 했고, 웃고 싶지만, 웃을 수 없다는 것이 또한 ‘문제’다. 이미 우리는 알아버렸다. 그 뒤에 숨은 저들의 정치학을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고백하길 바란다. 녹음된 ‘경제’를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미디어의 관대한 반복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이다. 차라리 인정하길 바란다. ‘경제’ 그 말 너머에 아직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차라리 사과하길 바란다. 솔직히 ‘경제’라는 말로 우리의 열망들을 단순화시킨 것이 미안하다고 말이다. 우리는 먹기만 하면 만사태평한 아기가 아니다.

한 비평가는 저들을 가리켜 욕망에서 실행으로 직행하는 ‘이드’의 정권이라고 말했다. 그것조차도 ‘그럴 수 있다 치자.’ 정말로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우리에게도 강요하고 더 나아가 그게 먹혀들고 있다는 점. 그러니 아직 더 정색하고 더 분노하고 더 요구해야 한다. ‘잘 먹는’ 것을 넘어서서 ‘잘 살고’ 싶다고 말이다. ‘경제’ 너머에 있는 우리의 열망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가령 최인훈은 이를 이런 식으로도 말했다. “‘자유’라는 말 한마디로 노예대중을 분기시켰다”( 『화두』에서 )  고. 칭얼거리면 일단 수면제 섞은 젖병부터 물리고 보는 귀찮고 서투른 아빠에게 아이가 ‘말’한다. “차라리 그러시려거든 메마른 이유식과 거친 밥과 더러운 과일과 질긴 쇠고기를 주세요. 저는 마냥 아기가 아니랍니다.” 

류한형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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