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렇게’만들어진 문화보다는 구성원들 사이의 철학적 공감대를 전통으로 남겨야

2월의 마지막 주,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졸업식이 열렸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교정은 졸업생들과 그 가족들로 북적거렸고, 졸업식장뿐 아니라 학교 이곳저곳이 모두 사람으로 넘쳐났다.


그런데 굳이 자기 과 건물을 찾아가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노라니, 문득 ‘몇 동 앞에서 사진을 찍은들 모두 똑같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낭만에 초치는 소리같지만, 교정 안의 건물이 모두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10여 년 사이에 새 건물이 많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내가 입학할 적만 해도 ‘박정희가 베트남전에 파견했던 퇴역 장병들을 시켜 건물을 지어서 건물들이 다 막사 모양으로 똑같이 생겼다’는 유언비어도 있었다.


아쉬운 것은 비단 건물만이 아니다. 나는 우리 학교의 학위복을 볼 때마다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사각모에 검정 가운은 만국 공통의 유서깊은 복식이다. 그러나 20년 전 텔레비전의 ‘부리부리박사’에서부터 요즘의 유치원 어린이집 졸업식장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개성 없는 복식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성균관대학교에서는 성균관의 전통을 살려서 한복 스타일을 가미한 졸업 예복을 입는다. 고려대학교도 최근 학위복을 새로 맞추면서 디자인을 바꾸었다고 한다.


물론 낡은 학위복은 나쁘고 새 학위복이 좋다, 또는 서양식 학위복은 나쁘고 ‘퓨전’ 학위복은 좋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의 뜬금없는 불만의 정체는, 우리 학교를 찬찬히 뜯어 보면 ‘그냥 그렇게 된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교정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어떤 건물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학위복은 어떤 모습으로 만들 것인가, 등.. 첫 단추를 채울 때부터 학교 구성원들의 뜻을 모으고 학교의 이념을 담아낼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할 수도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그냥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교정의 건물들은 옛 건물과 새 건물이 따로 놀고,  새 건물들은 끊임없이 관악산을 야금야금 갉아 들어가고, 수많은 이들이 매년 참여하는 입학식이나 졸업식이건만 함께 나눌 수 있는 문화적 상징이 없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구성원들 사이의 철학적 공감대를 만들지 못했던 탓이 아닐까?


내가 우리 학교 학위복에서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오래돼 보인다거나 사이즈가 다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기에는 과연 서울대학교의 이념과 철학이 녹아 있는가? 모든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는 이념과 철학이 있고, 그것이 학위복에 녹아들어 있다면, 아무리 멋이 없고 낡은 옷도 그 자체로 유서깊은 전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이 담겨 있지 않다면, 비록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럭셔리 웰빙 스타일의 학위복이라고 해도 나는 걸치고 싶지 않다.


이번 졸업식 날에는 내가 평소 존경하던 선배가 오랜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가운을 빌리러 갔더니만 190cm의 큰 키에 맞는 옷이 별로 없어 찾느라 애를 먹었단다. 그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옛날에 비해 학생들의 평균 키나 몸무게가 모두 커졌을 테니 조만간 졸업 가운도 새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학위복을 새로 맞추게 된다면, 나의 이런 백일몽 같은 생각도 한번쯤은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김태호(협동과정 과학사 및 과학철학 전공ㆍ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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