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여우가 배가 고파서 포도를 따먹기 위해 과수원 벽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손을 내밀었다. 굵은 포도알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포도를 한 송이 땄는데 포도가 너무 커서 도저히 손이 빠질 것 같지 않았다. 이리 저리 흔들다가 실한 포도알 대부분이 떨어지고 으깨어졌다. 그래도 여우는 그 포도를 땄다며 신이 났다. 어리석은 여우의 허기를 잠시 달래기 위해 농부가 1년 간 피땀 흘려 맺은 열매는 엉망이 되어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이번에 16대 국회의원들이 여우같은 짓을 했다. 3월 2일 국회에서 허울뿐인 친일진상규명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 법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좌절된 이후 55년 만에 다시 국가차원에서 친일청산에 나설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데 나름의 의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아니라 걱정의 한숨이 나온다. 이 법안에 친일파 진상을 규명하는데 교묘한 방해공작을 펴는 기만적인 조항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제23조 ‘조사대상자의 보호’ 조항에서 “누구든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의 기간 중 행정기관겚병?사법부겵뗍?단체 등의 특정한 지위에 재직한 사실만으로 그 재직자가 이 법에 의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으로 신문ㆍ잡지ㆍ방송(인터넷 신문 및 방송을 포함한다) 그 밖의 출판물에 의하여 공표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이를 어긴 경우 엄중하게 처벌하도록 함으로써, 헌법상의 기본권인 언론 출판의 자유ㆍ학문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이는 국민적 지지 아래 그나마 힘을 얻어 추진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의 민간 연구를 크게 위축시킬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또 수정안에서는 조사대상을 극도로 제한하고, 조사기간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시켰으며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대상자에 대해 져야 할 책임과 이를 어겼을 때의 처벌규정은 크게 늘어난 데 반해 협박과 위협을 받을 개연성이 높은 위원들에 대한 보호장치는 과감히 삭제해 버렸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이는 ‘친일파 청산법’이 아니라 ‘친일파 보호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국회 앞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려의 목소리도 무시하고 위헌적인 ‘독소조항’까지 포함된 이 법을 통과시키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친일파 청산법’이 아니라 ‘친일파 보호법’으로 변해
친일진상규명법이 총선을 위한 일회용 법인가

이 법은 단지 총선을 위한 일회용이 아닌가. 법이 통과된 후 한나라당은 원안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괴물조항’으로 가득찬 법안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 이상 한나라당을 친일정당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라고 만족스런 농을 던진다. 열린우리당은 “17대 국회 개원 직후 곧바로 수정안을 내겠다”라고 공언하지만 총선에 ‘생색’을 내기 위해 이 법안을 무리하게 통과시킨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사실 17대 국회가 열려도 임기를 4년이나 앞둔 국회의원들이 이 법안에 눈길이나 줄지 의문이어서 이 법이 오히려 친일진상을 규명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친일진상규명법은 국회에서 한 바탕 얻어맞고 나서, 국회 본회의 문턱에서 부결된 ‘6ㆍ25 민간인 학살진상 규명법’의 시체를 등에 업고 국회를 빠져 나와야 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는지 자기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법인지조차 잊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는 잊어서도, 속아서도 안 된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16대 국회의 당리당략에 의해 무참히 으깨어진 어제를 기억하고 역사 청산을 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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