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마다 어김 없이 치러야 하는 귀성전쟁은 한국인의 독특한 내세관과 관계가 깊다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유한자(有限者)인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데, 문화권마다 그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집트 문명에서는 사자(死者)가 언젠가 부활한다고 믿었기에 죽은 육신을 미이라로 보존하였고, 인도 문명에서는 윤회를 믿기에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낙천적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은 자식을 통한 해결이다. 대를 잇고 자식을 번성시켜 죽음을 극복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제사ㆍ족보ㆍ풍수와 장묘문화 등 우리의 고유한 풍습들은 한국인의 이러한 내세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리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어디 그 뿐일까, 어느 영화에서처럼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인 아우를 제대시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형의 희생은 이렇게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 한국인에게 자식은 신이고, 교육은 종교이다. 그래서 이 사회의 교육문제는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 이역만리 타국에 이민가서도 자식 가르칠 것을 먼저 생각하고, 파출부를 해서라도 자식의 사교육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유난스런 교육열은 ‘영생에 이르는 길’과 닿아 있다.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쌓는 열정으로 우리는 과외를 시키는 것이다.

‘대학입시의 자율화’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 

매년 홍역처럼 앓는 한국의 입시는 귀성전쟁과 많이 닮았다. 몇 천대가 통행할 수 있는 고속도로에 50만대의 자동차가 몰려드는 꼴이다. 이 절대경쟁의 상황에 신호체계를 조금 개선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리가 있겠는가? 어느 한 해도 입시제도가 같은 적이 없었지만 교육문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본고사ㆍ예비고사ㆍ학력고사ㆍ수능고사ㆍ내신 등등 온갖 기준을 적용시켜 보았지만 해마다 상황은 악화되기만 한다. 심지어는 서울대를 없애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극단적인 견해도 보이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그것이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명쾌한 해결책은 있는가? 안타깝게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제도개혁이 나오더라도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제도의 사회문화적 토대가 함께 변해주어야 하는데, 삼천년을 이어온 신앙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부분적인 대증요법으로는 이 고질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나면 입시개혁의 방향은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입시제도를 변화시켜 사교육 문제, 사회적 형평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사교육문제는 고등학교간 경쟁을 통한 공교육의 정상화로, 사회적 형평은 장학제도나 소득재분배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 입시에는 단 하나의 기준, 즉 범세계적인 무한경쟁의 지식사회에서 국가경쟁력의 근간인 대학의 지적 수월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만을 고려하는 것이 옳다. 오히려 그 때 사교육을 완화하고 사회적 승복가능성과 형평성을 높일 수 있다.

 

그렇다면 입시에 관한 한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간단하다. 학생들을 교육할 주체인 대학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면 된다. 대학입시의 자율화가 모든 교육문제를 해결할 최선의 대안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 나라의 지적 수월성을 담보할 수 있는 차선의 대안은 된다. 입시제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목표를 함께 달성하기 위해 온국민을 소모적인 경쟁으로 내모는 관료적 규제가 아니라, 가장 창의적이고 지적 독립성이 뛰어난 학생을 당당하게 선발하고 교육하여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게 하는 자율적 기반의 조성이 필요하다.

김난도 교수(생활대 교수ㆍ소비자아동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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