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문지기’를 만나다

1975년.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동장군이 특히 기승을 부렸다기보다는 내가 겪은 겨울이 그러했다. 그동안 신부가 되기 위해 15년 동안 한 눈 팔지 않고 외길을 걸어오다가 신부가 되기 직전 스스로 길을 바꾸면서 자초하게 된 겨울이었기 때문이리라. 붙잡는 따뜻한 손들을 뿌리치고 무작정 짐을 챙겨 나오기는 했으나 막상 갈 곳도, 잠잘 곳도 없었다. 밤늦게까지 이길 저 길을 걷다보면 서울의 불빛들은 명멸하는데 내 몸 하나 눕힐 데가 없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신부가 되기 위해 세속과 차단된 채 신학원에서 살면서 먹는 걱정, 잘 걱정은 안하고 지냈는데, 갑자기 빵과 잠의 문제를 동시에 걱정해야 하는 ‘삶의 현실’에 내몰린 것이었다. 돈도 없고 있을 데도 없어 영락없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노숙자 신세가 되었으나, 나 자신의 선택이었던 만큼 누구를 원망할 처지도 아니었다. 특히 낮에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차가운 겨울이어서 당시로서는 다방이 제격이었으나, 먹을 걱정을 먼저 해야 했던 나에게 다방 역시 비싼 곳이었다.

그래도 궁하면 통한다든가! 궁리 끝에 발견한 곳이 종로 2가의 종로서적센터였다. 스팀이 들어와 따뜻하고 또 아늑하며 오래있어도 누구도 눈치주지 않고 아무 말 안 하던 곳, 그야말로 고마운 곳이었다. 종로서적은 시간을 죽이거나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넓으면서도 좁았던 그곳을 별 생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문득 손에 잡힌 책이 카프카의 『심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심판』은 내게 수수께끼 같고 신비스러운 책으로 다가온다. 무엇인가 보물이 있을 법한데, 막상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 보물을 찾기는 어려운 책, 『심판』을 볼 때마다 초등학교 때 소풍가기만 하면 늘 하던 보물찾기가 떠오른다. 그 『심판』에서 유난히도 마음에 와 닿았던 대목이 바로 ‘법원의 우화’였다. 법원에 들어가려고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앞에 딱 버티고 선 문지기. 그 문지기 앞에서 주눅이 든 시골사람은 사정에 사정을 거듭하다가 안 되자 절망과 좌절을 거듭하면서 죽음을 맞는다. 죽을 때가 돼서야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질문을 한다. “이문은 누구를 위한 거요?” 결국 시골사람은 문지기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서있던 도우미인 줄 모르고 자신의 길을 막기 위해 있던 존재로 오해했던 셈이다. 문지기는 본의 아니게 ‘속인 사람’이 됐고 시골사람은 ‘속은 사람’이 됐다.

절박했던 만큼 나의 모습이 시골사람과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두고두고 ‘법원의 우화’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백수로 있었던 나의 삶에 ‘법원의 우화’가 철학적 의미를 갖는 메시지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직면했던 실존적 상황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내 마음은 삶의 여정에서 조우하게 되는 수많은 어려움이 걸림돌이 아니라 나를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점을 믿어야한다는 당위로 가득찼으나 시간이 가면서 어느덧 당위는 사실적 명제로 치환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어려웠던 당시 그처럼 위안을 준책도 없다. 보에티우스가 쓴 『철학의 위안』이란 책도 있지만, ‘문학의 위안’도 있을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지금도 이 책을 보게 될 때마다 종로서적이 생각난다. 아쉽게도 지금 종로서적센터는 없어졌지만, 그 속에서 읽은 『심판』 은 여전히 ‘죽은 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책’으로 또 ‘자성예언’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지금도 내 마음엔 1975년 겨울이 추우면서도 따뜻했던 겨울로 남아있는가 보다.

효종 교수(사범대ㆍ국민윤리교육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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