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관기] 동서양 각국 문서학의 전개 과정

고문서학(diplomatics)은 문서의 양식, 재료, 용어, 문체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각종 고문서를 분류, 정리하는 학문으로 역사학 연구의 기초가 된다. 한국고문서학회는 ‘동서양 각국 문서학의 전개과정’을 주제로 지난 12일(목)부터 이틀간 세계 각국의 문서학 발전과정에 대한 워크숍을 개최했다. 한국고문서학회는 지난 1991년부터 고문서 조사, 정리방법론, 한국고문서정리표준화연구 등을 비롯해 고문서학의 토대를 쌓는 연구를 해왔다. 이번 워크숍에서 연구자들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 등 동서양 주요 국가들의 고문서학 전개 과정을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아카이브즈학(archival science, 문헌 자료를 관리하기 위해 자료의 출처, 문서군의 계층구조를 파악하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여러 문제점을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양진석 연구원의 「한국 고문서학의 전개과정」, 와타나베 고이치 교수(일본 국문학연구자료관)의 「전근대 일본의 아카이브즈와 관리」, 안드레아 조르지 교수(이탈리아 트렌토대 예술학부)의 「이탈리아의 기록물과 기록관리학」, 올리비에 퐁세 교수(프랑스 고문서학교)의 「프랑스의 역사적 기록물과 관련된 공문서학 및 기록학: 역사, 제도, 이론」 등이 발표됐다. 사회를 맡은 박성종 교수(관동대 국어교육과)는 각 발표문에서 제기된 논점을 △문서 개념 △고문서의 시기 구분 △기록물 보존방식 △앞으로의 과제 등 네 항목으로 요약해 토론을 진행했다.

그동안 한국 고문서학계에서는 ‘갑의 특정한 의지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을에게 전달된 글’ 중에서 시기적으로 오래된 문서를 ‘고문서’라고 하는 정의가 통용돼 왔다. 그런데 이 정의는 1900년대 초에 독일의 고문서학을 도입해 일본의 고문서학을 정립한 구로이타 카츠미의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문서(권리관계를 증명하기 위한 낱장 증서)와 기록물(개인의 메모를 기록해둔 일기나 장부 등 성책 자료) 사이의 구분 등 아카이브즈학적인 정리 방법과 관련해 문서의 정의에 대한 반성이 이뤄지고 있다. 와타나베 교수는 한국의 고문서학계에서도 문서와 기록물, 문헌(낱장 문서나 장부 등 도서 자료를 모두 포함하는 자료) 등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관점과 전근대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문서, 기록물 및 문헌의 분류 체계를 토대로 문서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양에서는 옛 문헌을 정리할 때문서와 기록물을 분류하지 않고 문서군(Fonds)으로 통합 정리하고 있다. 조르지 교수는 문서와 기록물을 구분하는 것은 이론적으론 가능하지만 관리 차원에서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했다. 와타나베 교수도 문서와 기록물을 구분하는 것은 동서양의 차이가 아니고 고문서학과 아카이브즈학의 차이일 뿐, 일본에서도 고문서학을 확립한 구로이타 카츠미 이전에는 문서와 기록이 구별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퐁세 교수도 프랑스에서 고문서를 의미하는 ‘chartes’는 ‘문서’라기보다 ‘증서’의 의미를 가지며 문서와 기록물을 구분하는 것은 아카이브학에서는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문서의 시기 구분과 관련해 각국에서 쓰고 있는 시기의 개념도 달랐다.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당대 등의 개념은 각국에서 편의적으로 쓰이고 있고, 정치 체제의 변화는 문서 양식의 변화를 수반하는 경우도 있지만 체제의 변화와 관계없이 문서 양식의 변화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각국의 사정에 따라 문서의 시기 구분은 임의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조르지 교수와 퐁세 교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바로 20년 전의 문서일지라도, 즉 기록학에서 말하는 현용(현재 효력이 살아 있는 문서)-반현용(아직도 반쯤은 효력이 있지만 참조를 위해 보관돼 있는 문서) 단계를 거쳐 비현용(현재 보존기한이 끝나 효력이 없는 문서) 문서가 되면 바로 그것이 역사 기록이라고 말했다. 와타나베 교수도 일본에서는 보통 에도시대 이전의 문서를 고문서라고 관용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19세기 이전의 근세문서와 근대문서도 고문서에 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례로 에도시대부터의 문서를 가지고 있는 미츠이 문고는 1900년을 기점으로 자료의 시기 구분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료를 문서군이라는 틀 속에서 생각할 때 그 방식은 편의적인 것이고,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미츠이가(家)는 에도시대의 장부 기재 방식을 쓰고 있으므로 메이지 초기의 문서도 고문서로 취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문서의 정의와 시기 구분 문제는 문서 자료의 정리와 관리 방식으로 귀결되는데, 도서관에서는 자료를 하나의 콘텐츠로 보고 한 책씩 정리할 수 있지만, 문서관(archives)에서는 자료가 하나의 콘텐츠임과 동시에 문서군 속에서 다른 자료와의 맥락을 생각하면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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