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죽음 강요하는 사회
모순에 맞서는 사람도 극복 힘들어
구조의 개혁 위해
참된 지식인의 역할 중요

살아있는데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면 산 것일까 죽은 것일까. 또 한 명의 여자 연예인이 자살했다. 영혼이 현실을 견뎌내지 못했다고 한다. 살아있는데도 살아있는 것이 아닐 때 그것이 죽은 것과 다름없다면, 현실이 그녀를 좀먹은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육체적 죽음을 제외한다면 유감스럽게도 위 사연이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다. 정신적 죽음을 강요하는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비단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입생을 나무라며 사회문제에 발 벗고 나설 것을 권유하던, 그래서 사회운동가가 될 줄 알았던 선배는 고시에 투신했다. 언론 얘기만 나오면 보수신문을 욕하며 사회의 등불이 될 것처럼 보였던 다른 선배는 바로 그 신문사에 취직했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는 술로 회포나 풀 수 있었지만 이젠 술로도 풀리지 않는다. 우리사회는 우리들에게 영혼을 죽일 것을 강요한다. 어쩌면 자살 권하는 사회로 이미 진입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이 분명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은 진부하지만 당연한 얘기다. 어떤 이는 우리에게 주머니에 넣은 손을 조금만 빼보라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혹은 과격하지만 짱돌을 들라고 독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움직여 본다 해도 그 뒤 삶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 그동안의 경험으로 충분히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행여 모든 이가 짱돌을 든다면 결과는 분명 달라지겠지만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우리들은 자신을 챙기는 것도 벅차다. 장삼이사들은 초인을 기다리거나, 손을 뺀 이들이 희생되는 동안 주머니에 손을 꼭 넣은 채 그 당사자가 자신이 아니길 바라며 주문을 외운다. 수백만명의 죽음 위에 세워진 안락한 해골동산. 영화 「와치맨」의 세계는 우리사회의 현실과 닮아 있다. 간혹 어떤 친구는 구조적 모순에 맞서 용감히 싸워보지만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그들만의 리그에 갇히거나 다시 자신을 죽이곤 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정녕 이 두 가지밖에 없는 것일까.

결국 이는 철저히 구조의 문제인데,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유가 절실하다. 이는 지식인의 역할이라 할 수 있고 우리가 지식인에게 기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가 교묘하고 섬세해질수록 그런 법이겠지만 불행하게도 지금의 지식인은 현학적인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듯하고 그들의 성은 더욱 견고해지는 모양새다. 지식인은 대중과 더욱 멀어지고 또 다른 권력자가 돼가고 있다. 각종 언론에서 지식인의 죽음이나 지식사회의 위기를 거론하는 것도 우리 지식사회가 현실로부터 더욱 유리되고 있다는 진단 때문이다. 사법부의 독립성 문제도 당사자를 욕하는 목소리는 크지만 그 이전에 이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됐는지를 철저하게 추궁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해결할 지식인은 찾기 어렵다. 지식인은 없고 정보 전문가만 넘쳐나는 형국이라 대중이 직접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도 읽으면서 지식인이 돼야 하는, 사르트르의 식상하지만 절실한 사유가 다시 필요한 때인 듯 보인다. 그러나 미네르바는 날개가 꺾이고 말았다.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영화 「무간도 2 - 혼돈의 시대」에서 조폭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찰이 되지 못하는 주인공은 아직도 경찰이 되고 싶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며, 짤막하지만 큰 대답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는 경찰이 된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리도 적절한 대답을 찾은 것일까. 최근 출판시장에서 이외수의 독설, 신경숙의 위로, 빅뱅의 열정이 잘 팔리고 있다고 한다.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좋은 사람의 모습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려는 것은 아닐까. 죽지 않고 살아서, 영혼을 팔지도 않으면서, 구조의 압력에 지지 않는,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 나도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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