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의 위기는 더이상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매체의 다변화로 평론가들은 과거에 누린 권위를 상당 부분 잃어 버렸다. 소위‘주례사 비평’이나 현학적인 비평이 횡행하는 등 평단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있다. 평론의 위기라는 현상은  문학,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등을 포함한 모든 예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평론이 우리사회 담론 배치에 큰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평론의 위기는 평론 자체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사회 담론 생산 구조 전반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담론 생산에서 주체적 역할을 담당해온 우리 사회 지식인 집단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대학신문』은  현재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평론가들을 초대해 현재 평론 위기의 양상과 그 원인,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평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위기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 

박성창 문학의 경우 평론의 역사가 다른 분야에 비해 오래됐고 담론의 층위도 다양하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발언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문학평론은 시대나 사회에 관한 발언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우회적 통로였다. 그래서 문학평론은 작품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시대나 사회에 관한 이야기였고 문학평론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겸해야 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여러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문학평론의 지평은 작품 자체에 머물게 됐다. 최근 일본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문학의 정치적․경제적 기능은 끝났다’고 말했다. 문학이 정치․경제 바깥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일례로 신경숙, 황석영과 같은 작가들이 꾸준히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문학의 종언을 말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래 언급돼 온 위기는 문학의 위기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평론의 위기에 가깝다. 주례사 비평이나 현학적 비평은 1990년대 초 이래 문학평론이 처한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대중과의 소통능력을 상실해 현재 수많은 잡지에 실리는 문학평론이 실질적인 독자를 잃어버린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반이정 다른 예술 분야는 주로 소비 주체인 대중들에 의해 평가받는 반면, 미술 분야는 미술계에 속한 전문가 집단이 평가의 주체가 되는 속성을 갖는다. 미술은 향유자가 실질적으로 직접 평가·참여하기 힘든 영역일 뿐만 아니라 미술은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항간의 믿음 또한 크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미술은 창작 현장에서든 평론 현장에서든 외부의 견제 없이 생존 가능한 예술 장르다. 따라서 미술(평론)은 고립됐지만 무너질 리 없는 굳건한 섬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미술 공동체 내부에서 온전한 견제와 평론이 존립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많은 미술 평론가들이 평론의 자주권보단 집단의 이해에 얽혀 평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미술계와 연관된 사회적 사건들이 평단보다는 외부 매체를 통해 폭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95년 이후 광주 비엔날레를 비롯해 논평자가 필요한 국가적 대형 미술 행사는 미술평론가들이 평론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준 측면도 있다. 한편 평론이 미술종합지의 난해한 평론과 저널리즘 평론으로 양분된 것도 평론위기의 원인으로 지적할 만하다. 미술종합지 평론은 전문가 그룹을 독자로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미를 알기 어렵고, 이에 반해 저널리즘 평론 중 일부는 일반 독자의 수준을 오히려 하향 평준화시켰다.

박준흠 한국에서 대중음악 평론이 위기라고 말하기 전에, 음악평론이 정상적이었던 때가 없었다고 말해야 옳다. 평론을 하기 위해서는 작품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껏 한국의 음악 담론은 주로 음악 자체가 아닌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영역만을 다뤄왔다. 서구 대중음악 애호가를 비롯한 소수 마니아 집단에서 이뤄진 평론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음악평론이 정상적으로 존재했다고 하기 어렵다. 영미권에서는 1950년대 말 모던포크를 중심으로 음악평론이 등장해 1960년대 들어 음악전문지가 생겨 음악담론이 이뤄졌지만 한국에서는 그 역사조차 찾기 어렵다. 오히려 최근에 와서야 평론가가 제대로 평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인디음악이 하나의 음악 컨텐츠로서, 작가의 작품으로서 인식되면서 평론의 대상이 생겼다.  평론을 하는 입장에서 최근 음악계 내부의 상황은 긍정적이다.

황진미 보통 영화평론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시기는 1990년대 이후다. 그 이전에는 영화평론이 대중과 접점을 갖지 못한 채 영화계에 속한 소수 사람들 사이에서 이뤄졌다. 1990년대 한국영화 붐이 일면서 부산영화제가 만들어지고 「씨네21」이나 「키노」 같은 영화잡지가 창간됐다. 영화평론의 위기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7년 「디워」 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 평론가 집단은 이전의 권위와 신뢰를 잃었다. 오죽하면 평론가가 좋다고 하는 영화는 재미가 없고 흥행이 안 된다는 역설이 존재하겠는가. 영화평론의 위기 상황을 보여주는 또 다른 국면은 8년 역사의 「필름 2.0」이 무기 정간에 들어가고, 「프리미어」가 폐간됐다는 사실이다. 영화 담론을 담아낼 지면이 점차 줄어드는데 평론과는 거리가 먼 엔터테인먼트성 기사들은 엄청난 양으로 유포되고 있다. 시장에서 요구하는 짧은 가십성의 글은 넘쳐나고 진지한 영화평론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상황, 이것이 진정한 위기다. 그래서 최근에는 지면보다는 개인 블로그가 활성화되고 있다. 급격한 매체 변화를 겪는 중이다.

위기는 어디서 왔나  

박성창 문학평론의 위기를 불러온 가장 큰 원인으로 평론가들이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위치를 확보하기 힘들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평론의 축이 이념에서 자본으로 이동하면서 대부분의 평론가는 자신이 속한 출판사 책에 대해 제대로 된 평론을 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졌다. 평론계 내부 문제로는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지 않다는 점 또한 문학평론의 위기를 불러온 중요한 이유다. 문학평론은 저널리즘의 영역인데도 문학평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아카데미즘에 속해 있다. 평론과 학술논문은 분류돼야 할 영역인데 주류를 형성하는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사이에 제대로 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아 많은 이들이 평론을 학술논문으로 생각하면서 문학평론이 너무 어려워졌다.  최근에 인터넷 상에 인기 작가들이 소설을 연재하면서 독자 또한 인터넷 상에 직접 작품에 대한 평가와 분석을 내놓는다. 이들의 평가와 분석이 인터넷 공간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된다. 이런 상황에서 평론가의 역할이나 입지가 이전에 비해 좁아진 것은 사실이다.

반이정 인터넷이 기존의 평론을 위협한 건 사실이지만, 인터넷 매체의 발달이 제도권 미술평론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야기한 것은 아니다. 미술과 미술평론이 외부로부터 고립돼도 존립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진정한 견제 세력 없이도 존립할 수 있는 구조야말로 미술평론이 직면한 위기의 실체다. 한편 미술담론을 평론가보다 전시기획자가 유도하는 전 세계적인 시류 또한 평론 위기의 한 요소로 본다. 비평가가 전시 기획을 맡다보니 평론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른 예술 평론과는 달리 미술평론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이 양극화돼는 것 또한 문제다. 평론가들이 미술잡지에 싣는 글은 재미가 없는 반면, 저널리즘 평론은 독자의 반응에 민감하다 보니 격이 떨어지는 예가 간혹 있다. 미술평론의 이러한 양극화의 원인으로 독자(관객)의 지적 수준 문제도 배제할 수 없다. 독자(관객)의 교양적 인프라가 탄탄할 때야 비로소 질 좋은 평론도 존립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미술의 요체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독자와 온전히 소통하려는, 평론가의 현실적 노력이 절실하다.

박준흠 음악평론의 경우 평론가가 평론만으로 삶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현재 한국에서 음악평론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는 대중음악 평론에 아카데미즘적인 요소가 부족해 많은 대중음악평론가들이 부업평론가로 전락하는 데서 비롯된다. 동시대 창작되는 무수한 대중음악을 모두 접하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의 압박이 심하다는 것도 위기의 원인으로 짚어볼 수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현재 한국에 통찰력과 혜안을 지닌 대중음악평론가가 없다는 사실이다. 음악마니아에서 출발하지 않은 음악평론가들이 1990년대 음악평론계를 점하면서 평론가가 대중에게 평론적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된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글만으로 대중과 소통하려 한 이들은 들을 가치가 있는 음악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음악 가이드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
 
황진미 1990년대까지만 해도 평론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그 결과 평론 자체가 권위를 지녔다. 1990년대 초반은 80년대에 사회과학을 익힌 이들이 활동 분야를 바꿔 대중문화평론과 영화평론을 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해외에서 영화를 전공한 사람들이 아카데미즘적 글을 쓰던 시기이기도 했다. 관객들 사이에선 문화적 목마름이 있었고 예술영화 붐이 일기도 했다. 이 시기 평론가들은 문화담론을 선도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독자들은 새로운 지식과 안목을 동경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포착된 영화평론의 위기는 이런 분위기가 사라진 것과 관계가 깊다. 관객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독자가 보지 못한 점을 짚어 주는 전통적인 평론가의 역할을 관객이 인정하지 않기 시작했으며, 이전의 권위도 잃게 됐다. 이러한 현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디 워」 논란이다. 대중의 선택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평론가의 견해를 존중할 것인가라는 이상한 이분법이 생겨났다.

 우리시대 평론은 무엇으로 사는가   

박성창 평론가는 작가와 작품을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좋은 평론은 그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평론을 읽은 후 읽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더불어 작품을 통해서 작품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시대적 맥락과 사회적 의미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면 최근 화제가 됐던 『88만원 세대』란 책에 나온 내용도 사실 2000년대 소설 속에 이미 제시된 것들이다. 문학평론가는 소박한 작품론에서 벗어나 경제학자보다 명민한 눈으로 『88만원 세대』의 테제를 포착해 젊은이들이 부딪힌 삶의 문제를 시대적 맥락에서 읽어줄 수 있어야 한다.

반이정 평론의 위기라고들 말하지만 평론은 반드시 필요하다. 평론가는 그릇된 다수의 견해에 맞서 전문가의 양식과 입장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 평론이 대중의 힘을 외면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전문가적 확신이 있다면 힘겨운 싸움에도 임해야 한다. 현재 그런 기본적인 소임이 수행되지 않아 평론이 위기라는 말이 수년째 떠도는 것이다. 어정쩡한 평론만이 난무하는 현재 상황에서 탈피해야 한다. 또한 평론은 시의성을 갖추고 세상과 교감해야 한다. 1980년대와 같은 격변기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회에는 항상 부조리가 있게 마련이다. 평론가는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를 견제하기 위한 동시대적 감각을 스스로 갖춰야 한다. 사회와 미술을 유기적으로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평론을 고립되지 않게 하고 버티게 할 것이다.

박준흠 앞서 대중음악의 경우 평론할 수 있는 음악적 환경이 조성돼  있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평론 없이 작가 또한 존재하기 힘들다. 대중음악계에서 평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궁극적 이유는 건강한 음악산업 발전을 위해서다. 음악평론가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음악생산자를 발굴하고 재평가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고 평론가의 평은 일반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평론가가 작가와 작품에 대해 얘기함에도 불구하고 일반 소비자에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다면, 즉 음반이 팔리지 않는다면 평론가는 실질적 의미를 잃고 만다. 평론가가 작품 생산자를 발굴하고 재평가하는 것은 음반이 팔리는 것으로 연결돼 대중들이 지속적으로 음악시장에 머무르게 하고 오래도록 음악을 좋아할 수 있게 돕기 위해서다. 음악산업의 선순환 구조를 가능케 하는 것이야말로 평론가의 역할이다.

황진미 정보가 제한됐던 시절, 영화 선택의 가이드 역할을 했던 평론가는 사라졌다. 이제 평론의 기능은 축소됐다. 1990년대 이후 사회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 담론을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정치적 억압은 없어졌다 할지라도 자본의 지배가 더욱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계급이나 민족, 젠더 문제는 이전보다 복잡하고 풀기 힘든 양상을 띠고 있다. 이제 평론가는 작품성뿐만 아니라 대중의 욕망을 사회적 맥락에서 짚을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과속스캔들」과 같은 평범한 영화를 왜 800만이나 관람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영화가 현재의 어떤 문화적 욕망과 맞아 떨어진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 영화평론은 영화텍스트를 기반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영화라는 현실사회의 반영이자 또 다른 2차 가공의 세계를 놓고 다른 차원의‘가치투쟁’에 임해야 한다.

평론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박성창 문학의 경우 창조적 글쓰기로서 평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열려야 한다. 또한 평론계 내부에서 인사이더들과 아웃사이더들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열린 구조가 필요하다. 건강한 저널리즘의 확립과 평론 웹진의 모색도 필수적이라고 본다.
 
반이정 평론가가 장기적 안목을 갖고 평론에 임한다면 평론은 충분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평론의 위기는 시류에 맞춰 말을 바꾸고 평론 양극화를 방관한 데에서 발생했다. 교과서적 답 같지만 이해관계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그리고 글쓰기의 진정성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평론 위기의 극복 방안이다. 미술의 경우는 아직 웹진을 논할만큼 독자나 미술인의 수준이 탄탄하지 못하다. 1990년대 후반 한국 화단에서도 웹진이 시도된 바 있지만 거의 고사 상태다. 인터넷이 유용한 미디어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2009년 현재 미술평론에서 주요 담론을 유도하는 데 긍정적 역할 모델이 될 거라 보지는 않는다.

박준흠 한국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다루는 음악 전문지가 오프라인에서 있었던 적은 없다. 온라인의 경우 현재 독립 웹진이 4개가 존재한다. 인터넷이 만들어지면서 대중음악 평론계에서는 인터넷의 수혜가 막대했다고 할 수 있다. 독립웹진은 사무실, 유통망이 없어도 된다는 점에서 비용을 절대적으로 줄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수의 전문 인력이 적은 비용으로 독자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다. 그러나 음악평론 웹진의 역사가 거의 10년 가까이 돼 가는데 4개에서 더 이상 늘어나지는 않고 있는 상황인 것이 안타깝다.  인터넷 포털들에 의해 문화적 취향이 획일화되는 상황에서 음악평론 전문 웹진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본다.

황진미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평론은 돈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돈과는 전혀 무관한 자세로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평론가는 영화평론이 실릴 지면을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매체를 통해 자기 견해와 입장을 풀어낼 필요가 있다. 영화평론가의‘그들만의 리그’는 결국 사멸하고 말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 관해서 담론을 쏟아낼 필요가 있다. 이제 영화평론은 TV 다큐멘터리나 뉴스클립, 드라마, CF를 포함한 광고영상물, 인터넷 동영상 등 일상적인 영역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여 영상이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에 대해 그 미학적, 정치적 의미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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