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 세 편의 드라마
독일 나치 신문인 「폴키셔 베오바이터」는 1933년 5월 11일 “루스벨트의 독재적인 경기회복 조치들”이라는 기사를 통해 미국이 국가사회주의적 요소를 가진 뉴딜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뉴딜정책을 시행하는 것에 대해 상반된 정치체제를 가진 독일은 왜 그런 평가를 내렸을까.

역사를 인간정신의 소산으로 보고 특정한 가치관점을 통해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문화사를 연구하는 볼프강 쉬벨부쉬는 『뉴딜, 세 편의 드라마』에서 미국, 독일, 이탈리아 사회를 분석해 뉴딜정책의 이면을 파헤친다.

그동안 뉴딜은 개인의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동시에 경제 모순들을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정책으로 인식된 반면, 파시즘과 나치즘은 인권을 무시하고 1인 독재 치하의 전체주의적 체제라고 평가돼 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통념에 반문을 제기한다. “뉴딜은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다소 파격적인 문구가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루스벨트는 꾸준한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중에게 자신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공고히 하는 대중 조작적 방법을 사용했다. 또 ‘블루이글’ 마크를 애국심을 자극하는 상징체계로 이용해 소비자들이 국산품과 수입품을 구별해 자국 물건을 구매하도록 유도했다. 수많은 실업자를 구제했다고 알려진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공사업은 국가가 법적, 경제적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뉴딜의 숨겨진 모습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적 요소가 다분히 섞여있는 뉴딜정책의 이런 측면은 우리의 상식에 반기를 든다. 그렇다고 저자가 뉴딜을 전체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공통성의 영역을 찾는 것이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뉴딜과 파시즘, 나치즘 간의 차이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뉴딜은 파시즘, 나치즘과는 달리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고 언론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 책을 옮긴 차문석 교수(통일교육원)는 “이 책은 미국적 질서인 뉴딜은 추앙하고 비미국적 질서인 파시즘과 나치즘은 폄하하는 ‘뉴딜의 신화’를 걷어 내려고 했다”며 “기존의 역사 해석 방식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이 책의 의의를 설명했다. 저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뉴딜의 특성들을 보여줌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미국적 질서에 예속돼 신화화된 뉴딜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한 상식이 이데올로기의 산물일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의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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