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중 김미화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무엇일까?
① 코미디언
② 손석희가 뽑은 최고의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③ 국가인권위원회 홍보대사
④ 사회봉사활동가
⑤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에 재학 중인 늦깎이 학생.

정답은 ‘모두’다. ‘음메~기 살어’라는 유행어로 많은 인기를 누린 최고의 코미디언. ‘코미디언이 시사프로를 진행할 수 있겠나’라는 의구심을 ‘청취율 1위’ 기록으로 날려버리고 손석희로부터 ‘최고의 진행자’라는 찬사를 받은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홍보대사이자 불우이웃 돕기, 장애인 봉사활동, 여성운동 등 사회공헌 활동을 많이 하기로 손꼽히는 유명인. 그리고 불혹이 넘은 나이에 대학의 문을 두드리고 10여년째 공부 중인 학생. 모두 김미화를 수식하는 단어다. 『대학신문』은 최근 MC 교체설로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그를 만났다. MBC 라디오 방송국에서 만난 그는 무척 바빠 보였다. 1시간 남짓 진행된 인터뷰 중간에도 수차례 휴대전화가 울렸고, 도중에 ‘관악노인복지관’ 홍보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에게 붙은 많은 수식어를 증명해주는 듯했다.  

인터뷰 및 정리: 강진규, 김의연 기자 사진: 김지민 기자

◇2003년 당시 굉장한 인기를 구가하던 코미디언이 시사프로그램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모든 역할은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오는 것 같아요. 내가 시사프로를 할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피디가 제의를 했어요. 아침에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있으니까, 오후 같은 시간대에 시사프로로 승부해 보려는 계획이었죠. 저녁 시간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딱딱한 진행보다는 재미있고 편안한 진행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 절 섭외한 거죠. 

사실은 이 시간대는 행사가 많아서 코미디언한테는 돈벌이하기 가장 좋은 시간대에요. 그래서 망설이기도 했는데, 피디가 “이제 방송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느껴야 할 나이 아니냐”라고 하는 말을 듣고 ‘딱’하고 오는 깨우침이 있었어요. 돈벌이도 좋지만 시사프로를 진행하는 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죠.

◇당시 개그계나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요.
후배들에게는 획기적으로 다가왔나 봐요. 앵커나 기자들이 하는 뉴스프로그램을 코미디언이 진행하는 건 처음이다 보니 저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봤죠. 후배들은 내가 똑똑한 줄 알아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웃음) 저에게 “선배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하는 후배들도 많은데, 그런 말을 들을 때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보람과 개그로 사람들을 웃기는 보람이 있을 텐데, 어떤 차이가 있나요.
방송을 통해 하는 것은 똑같아요. 시사프로 안에서도 내가 웃기게 진행해서 사람들이 웃으면 좋죠. 그 둘을 나눌 필요는 없어요. 나 같은 사람들은 어디서든지 사람들을 웃겨야 된다는 ‘나쁜 피’가 흐르는 것 같아요.(웃음) 시사프로 안에서도 웃음을 추구하죠. 본능이에요.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서 여러 시사문제를 접했을 텐데, 대학생과 관련된 정책 등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가요.

요새 가장 큰 문제는 등록금 아닌가요. 등록금 인하 투쟁하며 삭발도 하고 울기도 하는 학생들을 봤어요. 다들 내 딸이고 아들인데, 마음 아프죠. (그는 대학생 아들이 있다.) 학생들 요구가 관철되면 좋겠지만 대학 입장이란 것도 있으니까…. 관계자를 연결해 봐도 등록금을 내리긴 힘들 것 같거든요. 등록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다면 그 안에서 대학생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요구를 했으면 좋겠어요. 좀 더 지혜롭게 요구하라는 거죠. 내가 높은 자리에 있으면 다 내려주고 싶은데(웃음), 안타까워요.

◇지난 2001년 성균관대에 입학한 데 이어 올해엔 석사과정으로 진학하셨는데요. 약간 늦은 나이에, 사회적으로도 많은 것을 이뤘는데도 다시 공부를 시작한 이유가 있나요.

시의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생각이에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난 잘 흘러가요. 그동안 열심히 산 편이라 방송 쪽 인프라도 많고 토대가 좀 탄탄하죠. 그래서 흘러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고인 물이 생겨요. 그런 것들에서 탈피해 스스로 물길을 내고 싶은 마음인 거죠.

사실 나이 들어서 공부하려니까 잘 안되긴 해요. 그래도 교수님께 강의 듣고 젊은 학생들과 토론하다 보면 깨우치고 느끼는 게 많아요.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신선하고. 더 나이 들어도 학교는 계속 다니고 싶어요.

◇요새 대학생들은 취업난 때문에 소위 ‘스펙 쌓기’ 등에 매몰돼 있다는 평가를 듣곤 하는데, 실제 만나본 대학생들의 느낌은 어떤가요.

너무 공부만 하는 불쌍한 대학생. 얼마 전엔 서울대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어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놀기도 잘 놀면 좋은데 잘 못 노는 것 같아요. 여담이지만 성균관대는 또 애들이 유교사상이 있다고나 할까, 학생들이 선비 같아요.(웃음) 제가 판을 벌여놓아도 놀지를 못하더군요.

취업 때문에 쫓겨 다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예전에는 베르테르의 슬픔을 논하고 책을 끼고 다니는 대학생들 나름의 낭만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기껏해야 수업 끝나고 학교 앞 술집에서 한잔하는 게 전부니까요.

◇기억에 남는 학생의 모습이 있다면요.

학교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밥을 자주 사줬는데, 이게 소문이 나서 내가 수업받는 교실 앞에 대여섯명이 ‘선배님 밥 사주세요’라고 모여 있곤 했던 게 기억나네요. 교수 식당에서 3천원짜리 밥을 사주곤 했는데 학생들이 정말 좋아했어요.(웃음)

◇바쁜 일정임에도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사회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자신과의 약속이었어요. 전 ‘하느님, 저를 유명한 코미디언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늘 기도했는데, 됐잖아요.(웃음) 너무 감사해서 ‘유명해지면 봉사하면서 살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또 기도했죠. 사실 내가 봉사하러 가면 많은 사람이 기뻐해 주는 데다가, 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그리고 사실 봉사를 한다기보다는 내가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우리는 자기 수중에 돈이나 여유가 있을 때 남을 돕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오히려 봉사는 내 수중에 돈이 없고 힘들 때 하는 거예요. 내가 힘들 때 이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저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자신한테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데요. 봉사란 것은 내가 없을 때 가서 도움을 받아오는 것에 가까워요.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은 무엇입니까.

지체장애인들과 노래자랑 행사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지체장애인들이 손등으로 박수 치고, 발등으로 걸으며 열정적으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죠.

사람들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나 소외계층을 많이 접하지 않으니까 잘 몰라요. 그들이 얼마나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이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고 무엇을 바라는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채 남의 일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인권위 홍보대사로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인권위에서 하는 전반적인 일을 그냥 잘 지켜보고 있어요. (웃음) 가끔 장애인 단체라든가 소외계층을 방문하고 체험해요. 우리 사회에 어려운 분들이 많은데도 그분들의 인권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예를 들어 중증 장애인이 어떻게 일어나서 씻고 어떻게 옷을 입는지, 어떻게 외출을 하는지 잘 모르잖아요. 또 그분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국가가 책임져주는 서비스를 당당히 받는 것’이에요. 자원봉사로는 한계가 있어요. 그분들이 겪는 일상생활의 모든 문제를 봉사로 해결하는 것은 무리예요.

걷는 것을 보조해주고, 휠체어 밀어주고, 청소해주는 일을 하면 정당한 대가를 줘야 해요. 정당한 국가 서비스 차원에서 복지를 실시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너무 ‘자원’ 봉사에만 기대요. 사회복지가 자원봉사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도움을 받는 사람이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나 떳떳하게 자기 책임을 지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들은 장애인이나 소외 계층에 대해 많은 배려를 하고 있어요. 그런 배려로 인해 인권이 신장한 거죠. 그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닐까요.

◇대학생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자신을 냉철히 돌아봐요. 스스로 누구를, 무엇을 위해 사는가 고민해야 해요. 또 타인들 때문에 혹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갈 길 앞에서 주저하고 있진 않은지 고민해야 해요. 왜 부나방이라고, 불을 피우면 환한 불 속으로 확 날아 들어가는 나방들이 있죠. 화려해서 뜨거운데도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자신
을 던져보는 모험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돈 못 벌고 굶어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 행복해요. 저만 해도 어릴 때부터 꼭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는데, 만약 부모님이 시켰다면 오히려 중도에 포기했거나 딴 길을 찾았을 것 같아요. 오히려 부모님이 하지 말라고 반대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거니까 힘들어도 견뎌야겠다’는 뚝심이 생겼죠. 부모나 타인이 바라는 길 말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라고 권해주고 싶어요.

◇부모님께선 어떤 길을 가라고 하셨나요.

부모님은 여자는 고등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 구해 다니다 남편 잘 만나서 시집 잘 가면 땡이라고 생각하던 세대 사람이었어요. 전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상고로 진학했죠. 졸업하면 바로 취직할 수 있으니까.
난 그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요. 우리나라에 대학이 얼마나 많아요. 등록금만 있으면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어요. 이제는 특화교육이 필요한 것 같아요. 코미디언만 봐도 2년제 대학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미리 경험해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너도나도 좋은 대학 나와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 쪽으로만 경쟁이 치열해진 것 같아요. 기술이나 다양한 경험은 천대받고.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개그맨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왜 개그맨이 되겠다고 결심했나요.

어릴 때부터 코미디는 저질시비가 잦긴 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배삼룡, 서영춘 선생님의 연기를 보고 ‘나도 저 선생님들처럼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어요. 천직인진 몰라도 확고했죠. 더욱이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이성희, 주병진, 고(故) 김형곤씨 등 개그맨 시대가 열렸어요. 이분들을 보며 개그맨 컨테스트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상고 다닐 땐 빨리 졸업해 개그맨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는 상고를 졸업한 해 바로 개그맨이 됐다.) 

◇개그계에 복귀할 계획은 없나요.

지금 시사프로를 진행하는 것도 좋은 코미디를 하기 위한 힘 굳히기라고 생각해요. 또 언제 코미디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인생은 저절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지면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거죠. 사실 지금도 무척 재밌지만, 코미디에서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돼 있어요.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서의 이미지가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요.

방해가 되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망각의 동물이라 금방 까먹어요.(웃음) 내가 버라이어티에 몇 번 출연해서 웃기고 하면 될 거에요. 얼마 전에도 SBS 「야심만만」에서 내가 얼마나 웃겼는데요. 내가 뜨면 아직은 웃겨요.(웃음) 스스로 금을 긋거나 잣대를 대는 게 없으니 코미디에 최선을 다하면 문제 없을 거예요.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