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동향] 한국 거대과학 실태와 문제점

면적 약 20만 평. 사용된 전선만 6730㎞. 전자를 광속으로 가속하는 데 들어가는 전력은 2.5GeV. 이는 1V 건전지 25억 개를 직렬 연결해야 나올 수 있는 전력이다. 전자를 가속시켜 방사광-X선을 얻어내는 포항공대 ‘방사광가속기’는 한국 거대과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거대과학은 많은 과학자, 기술자, 연구기관을 동원한 대규모 연구개발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원자력, 우주항공, 핵융합, 가속기 등이 거대과학 범주에서 연구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산하의 거대과학지원관에서도 우주정책과, 우주개발과, 거대과학협력과, 핵융합연구과를 운영하고 있다.

교과부는 올해 업무계획에서 “거대과학 육성을 통해 과학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언론은 거대과학을 통해 국내 과학자들이 괄목할 만한 과학적 성과들을 이룩하고 그 효과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낼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거대과학에 정치·경제적 요소가 과도하게 개입할 경우, 즉 과학이 정치화됨에 따라 문제점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거대과학의 이점을 부각하기 전에 한국 거대과학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이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정치·경제에 좌지우지, 갈팡질팡하는 거대과학=한국 거대과학의 성공사례로는 포항공대 방사광가속
기를 꼽을 수 있다. 현재 방사광가속기에서 얻어낸 방사광-X선은 분자 수준의 구조를 규명할 수 있어 반도체 칩에서 신약개발까지 전 분야에서 이용되고 있으나 방사광가속기 운영은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지난 2002년 방사광가속기가 완성됐지만 정부가 포항가속기연구소를 정부에 귀속시키지 않으면 운영비를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임경순 교수(포항공대 과학사)는 “첨단 실험장치의 활용 여부가 그 기구를 사용할 과학자들이 아니라 정치가, 과학행정 관료, 경영자 등의 손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것이 거대과학이 가진 커다란 문제”라고 지적했다. 가속기와 같은 거대 규모의 과학연구는 엄청난 규모의 연구비가 필요한데 정치, 경제적 요인이 과학연구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7년 발표된 ‘국가핵융합에너지개발진흥기본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향후 30년간 장기적 비전 아래 5년 단위로 추진할 세부전략과 실천과제를 단계적으로 정립하고, 5년간의 추진 성과와 국내외 환경변화, 개발추세를 분석해 다음 단계의 기본계획에 반영하기로 하는 등 중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했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해 연구책임자인 국가핵융합연구소장을 해임해 국내 연구진들의 비난을 샀다. 당시 신재인 국가핵융합연구소장은 3년 임기 가운데 3개월을 남겨둔 상태에서 지난해 6월 5일 사표를 제출했다. 신 전 소장의 사표는 수리됐지만 정확한 이유는 발표되지 않았다. 그리고 정부는 3개월 공백 끝에 새 소장을 임명했다. 당시 연구원들은 “국가 백년대계에 대한 고려 없이 사표를 제출하도록 만들었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때문에 국가핵융합연구소는 지난해 완공된 한국형핵융합실험장치를 운영할 인력을 뽑지 못해 고심했다. 한 연구자는 “기관장 임명이 계속 보류되면서 중장기 계획을 구상하기는커녕 당장 올해 연구에 필요한 인력 구조도 재편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연구자는 “국가핵융합연구소와 한국원자력연구원과의 통합으로 인해 올해 어떤 연구를 해야 할 지 판단 내리기가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거대과학은 그 특성상 정치, 경제적 요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속에서도 과학자들의 역할은 확보돼야 하는 것이다.

◇사업 선정 과정에 시민 참여 필요=정부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을 추진하면서 3천여 명 규모의 기초과학연구원을 설립하기로 했다. 그 중 핵심은 중이온가속기 건설이다. 그러나 중이온가속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금동화 원장은 “연구를 제대로 하려면 대형 시설은 필요하지만 왜 하필 그것이 가속기여야 하느냐”며 “미래의 과제가 환경 문제인지 우주의 원리 규명인지를 먼저 논의하고 시설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거대과학은 그 규모만큼 사회적 영향력이 거대하지만 의사결정은 정부의 정책 결정자와 일부 엘리트 과학기술자, 연구비를 지원하는 대기업 등에 의해 이뤄진다. 그러나 소수 엘리트에 의해 결정될 경우 1940년대 거대과학의 일종이었던 맨해튼 프로젝트가 원자폭탄을 개발하게 된 것처럼 공적 이익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거대과학이 환경문제를 비롯한 일반시민의 공익을 확보하기 위해선 시민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환석 교수(국민대 과학기술사회학)는 시민참여 방식으로 ‘합의회의’를 제시한다. 합의회의는 ‘선별된 보통사람들이 정치, 사회적으로 논쟁이 되거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과학적, 기술적 주제에 대해 전문가들과 논의한 다음 내부 의견을 통일해 최종적으로 정리된 견해를 발표하는 하나의 포럼’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연구개발의 우선순위나 투자순위를 시민 패널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한다. 일례로 미 국립보건원은 8~20명 정도의 일반 시민에게 자문을 맡긴다. 김환석 교수는 “시민에게 국가사업을 선정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각기 의견이 다르지만 일반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시키는 통로를 만들 필요는 있다”며 “국가과학위원회에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매년 운영하는 등의 방식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환경 친화적이고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분야를 중점 육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천기술 확보=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올해 7월 발사를 목표로 100kg급 인공위성을 지구 저궤도에 진입시키기 위한 발사체인 소형위성발사체(KSLV-I) 개발, 우주센터 구축 및 운용 시험 중에 있다. 이 발사체 1단의 액체 로켓 엔진은 러시아에서 도입했는데 이는 액체 로켓의 국제 기술 이전이 엄격히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한국은 세계 5위 원자력 대국이지만 원천기술을 미국이 보유하고 있어 원전을 수출하지 못하고 있다. 김환석 교수는 “거대과학이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임에도 필요한 과학기술은 대부분 외국의 기술을 모방하거나 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다”며 “국내 과학기술자들은 사실상 산업화를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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