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 수첩 사건’에서 ‘장자연 리스트’까지

최근 언론인이 법정에 드나드는 일이 잦아졌다. 그들은 기자 신분이 아닌 형법 제307조 명예훼손죄를 어긴 ‘피고인’ 신분으로 출두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10일 ‘장자연 리스트’에 언급된 자사 임원의 이름을 공개한 청문회 내용을 기사화했다는 이유로 인터넷언론 「서프라이즈」의 신상철 대표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10년만에 언론인이 체포된 ‘PD 수첩 사건’도 정운천 전 농식품부 장관과 민동석 전 농식품부 정책관의 명예훼손 소송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던 중에 일어났다.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도 지난달 16일 ‘강남 룸살롱 행패 루머’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경향신문」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경향신문」은 최근 언론을 대상으로 한 명예훼손 소송이 유행처럼 번지는 현상을 비판하며 ‘명예훼손 소송 전성시대’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명예훼손 전성시대의 중심에는 언론사와 함께 ‘공인’이 있다. 언론사에 소송을 제기한 이동관 대변인, 정운천 전 장관은 모두 국가 조직에서 공적 지위를 가진 인물들이다. 「조선일보」도 언론의 사회적 위상을 감안할 때 공적 기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공인의 경우에는 명예훼손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정연우 민주언론연합 대표는 “언론사의 고위 임원은 사회적 공인이므로 공인과 관련된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공인이론’과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 개념에 입각한 영미의 명예훼손죄 적용=영국과 미국에서는 명예훼손죄를 적용할 때 공인과 사인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판례가 누적되면서 정립된 ‘공인이론’을 통해 공인의 범주를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정하고 있다. 공인이론은 공인의 범주를 △선거직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를 포함한 ‘공직자’ △연예인이나 언론인, 대기업 총수 같은 ‘전면적 공적 인물’ △공직자나 유명인은 아니지만 특정 논쟁에 참여함으로써 인지도가 높아진 ‘제한적인 공적 인물’로 구분한다.

많은 국가들에서는 공인과 사인의 분명한 구분을 바탕으로 공적 사안과 관련된 언론 보도에 대해서는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시키지 않는 원칙이 굳어져 있다.

영국 의회는 1993년 “모든 공직자는 언론의 비판을 받더라도 그것이 공적 관심사일 경우 명예 훼손으로 법원에 제소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미국에서는 1964년에 벌어진 셜리번 사건을 계기로 공인의 명예훼손 소송으로부터 언론을 보호하는 원칙이 수립됐다. 공직자인 셜리번이 허위내용을 담은 광고를 게재한 「뉴욕타임즈」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현실적 악의’가 없다며 언론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때 처음 도입된 현실적 악의라는 개념은 보도내용이 허위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를 뜻하며, 사법부는 이를 입증해야 하는 책임을 언론사가 아닌 소송을 제기한 피고 측에 요구했다.

◇내용의 ‘공공성’보다 ‘진실성’이 주 판단기준이 되는 국내법=국내 법원은 공인이론과 현실적 악의 원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있다. 2003년 이전에는 공인과 사인 간의 특별한 구분 없이 ‘공익성’과 ‘진실성’을 기준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처리해왔으나, 2003년 이후 공인의 명예훼손 판결에서는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공격’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이 원칙은 언론이 객관적인 자료수집과 분석,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경우에만 적용되며 법원은 언론의 감시, 비판기능이 이 원칙을 어기지 않는 한 제한돼선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언론의 의혹 제기에 대해 공인과 사인의 구분보다는 여전히 내용의 진실성 여부가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작용하고 있고, 명예훼손 무혐의에 대한 입증책임도 언론사에 지워지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공인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은 1995년까지는 매년 1~3건 정도에 머무르던 것이 2000년 들어 4~9건으로 늘어났다.

한국방송협회 윤성옥 연구위원은 공인 86명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 대한 판결을 분석한 「공인의 미디어 소송 특징과 국내 판결 경향에 관한 연구」에서 “공인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은 소송 건수의 양적 급증이 문제라기보다는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 승소율 측면에서 언론사에게 상당한 위축효과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다른 일반 사건들에 비해 공인의 명예훼손 소송의 원고 승소율은 70%로 매우 높은 실정이다. 윤성옥 연구위원은 “소송비용으로 인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언론활동을 위축시킨다”고 지적했다. 특히 인터넷 언론 등 그 규모가 영세한 경우에는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보도 사실이 진실인 경우에도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형법 제307조 1항에 근거해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있다. 유사한 법조항을 갖고 있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박경신 교수(고려대 법학과)는 “제기한 의혹이 사실인 경우에도 명예훼손죄로 처벌될 수 있는 형법 제307조 1항을 폐지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형사적 처벌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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