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전 민주화 부르짖던 광주
신군부의 폭압정치로 희생돼
현재 시청 앞 재연되는 상황에서
민주화 달성 위해 오늘을 살아야

5・18광주민주화운동(5・18)의 슬픈 역사는 영화의 소재로 심심찮게 사용됐다. 영화 「꽃잎」은 5・18이 한 소녀를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철저히 붕괴시키는 것을 조명했고, 영화 「화려한 휴가」는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울부짖으며 자신을 던져가면서까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을 통해 현대사의 상처를, 그리고 그 안의 개인의 상처를 목도케 했다. 그래서일까, 5・18은 그리 낯설지 않다. 실제로 2007년 『대학신문』의 대학생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80%에 달하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그리고 이화여대 학생들이 5・18에 대해 ‘잘’ 혹은 ‘대략’ 알고 있다고 답한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아야 할 불편한 진실의 전부일까.

역사는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민들은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한 박정희 군사독재체제에 항거했다. 이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갈등은 박정희 대통령의 저격사건으로 폭발했고, 유신체제는 붕괴했다. 이로써 새로운 민주사회로 발전해나갈 것이라는 꿈을 꿨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오래가지 않았다. 구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은 불안한 정국을 빌미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통치 시대로의 회귀를 알렸다.

국민들은 다시 일어났다.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운집해 계엄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뜻이 전해졌다고 믿은 학생들이 시국을 관망하기로 해 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상황은 급격하게 반전됐다. 신군부가 이를 틈타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단행하기로 한 것이다. 같은 날 10시경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등교 중이던 전남대 학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 사이에서 최초의 충돌이 발생했고, 비상계엄군이 대학을 장악하게 되면서 민주화를 부르짖던 평화 시위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시가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무력 진압행위를 만류하던 노인과 여성에게까지 무차별 곤봉세례가 가해졌다. 저항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더욱 거세졌고 광주는 시체로 쌓여갔다. 항쟁기간 경찰서 등을 점거해 총기를 탈취했던 시민군은 정규군에 저항하기 힘들다는 것을 절감하고 무장해제하기로 했으나 계엄군의 무자비한 학살은 계속됐다. 그리고 10일째 되던 5월 27일 대규모 진압군이 도청에 투입되면서 시위는 진압됐다. 무고한 어린 학생, 부녀자, 서민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의 현장은 외부로 전해지지 않았다. 이것이 5・18의 전말이다.

그로부터 29년이 흘렀다. 신군부에 의해 무력 진압된 후 암울한 침묵의 시대를 보내야만 했던 5・18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선 국민저항권의 적극 행사’로 인정받게 됐고, 덕분에 일 년에 한 번 기념식까지 치르는 국가 기념일이 됐다. 우리는 이들의 희생으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는가. 여기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계엄군이 광주 전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그 때의 그 상황이 현재 시청 앞에서 유사하게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촛불을 든 평화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 방패에 짓눌려 독기를 품었고, 시민에게 뿌려대는 물대포에 생채기를 입고 죽기살기로 대들었다. 그러다 연행된 사람이 부지기수다. 한술 더 떠 그들은 권력자의 재판 관여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부당한 권력의 횡포가 아직도 횡행하는 현재다.

늘 5월은 찾아온다. 신군부의 폭압 정치에 저항했던 그날을 숱한 기념일 중 하루로 여길 게 아니라 그들이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5・18을 맞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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