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복지에만 집중하는 총학
‘개인’에 매몰된 우리의 자화상
침묵과 무지도 죄가 될 수 있으니
지금 이 순간 책임있는 실천해야

현 52대 총학생회(총학)는 어찌 보면 분수령 같은 존재다. 「실천가능」 선본은 소위 ‘비권’ 선본으로 두 번 연속 총학에 당선됐다. 학생운동이 활기를 잃으면서 비권 선본의 영향력이 커져갔다. 첫 당선 때는 같은 비권을 제쳤고 두 번째에는 45.2%의 득표율로 다른 운동권 선본들을 여유 있게 따돌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총학은 좁은 의미의 복지에만 집중한다는 비판을 벗어버리지 못했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파동 때의 모습이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법인화 관련 총학 일정은 이제야 시작의 기미가 보인다. 이 추세면 총학이 말하는 총투표는 9월에나 할 것 같다. 처음하는 것도 아닌데 아직도 미숙한 걸까. 사안의 중요성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있는 힘껏 늦장 부리며 11월을 기다리는 걸까. 모를 일이다.

아, 숨차다. 학보사에 몸담은 언론인이라는 미명 하에 사회 참여 의식은 제쳐두고 학내 주요 사안에 대한 논의조차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하는 총학을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한숨 가다듬고 돌아보자. 이것이 단지 현 총학만의 문제인가. 아니다. 서울대의 이슈가 서울대 학생들의 이슈인가. 아니다. 법인화 공청회와 토론회의 저조한 학생 참여가 적나라한 메시지를 던진다. 학생들의 의회라 할 수 있는 전학대회 성사 여부도 항상 불투명한 것이 현재 학생사회다.

총학은 미우나 고우나 서울대 학생들의 대표다. 학생회의 필요성이 항상 논란의 대상이긴 해도 총학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지 않는 한 이는 보편적인 명제다. 현 총학이 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지만 글쎄. 총학이야말로 현재 서울대 학생들, 개개인의 삶에 바쁜 ‘우리’들을 거울처럼 반영해내는 완벽한 자화상, ‘진정한 대표자’다.

개인의 삶에 집중하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 잘못만은 아니다. ‘꿈꾸는 20대’는 이미 그 의미가 변질됐다. 현재의 20대를 묘사하는 대명사는 꿈꾸고 싶지만 꿈꿀 수 없는, 꿈 꿔야 하지만 꿈꾸지 못하는 20대다. 게다가 학내 사안은 졸업하면 그만인 일이다. 졸업이 늦어지는 추세지만 길어도 5, 6년이면 학교를 떠난다. 학교에 오래 머물러야 하거나 자신의 지위 보장이 걸려 있는 교수와 직원들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묻는다. 현실에 순응하고 남 일이라 관심 끊고 살면 되는 것이냐고. 옳은 것이냐고. 그르다. 우리에게는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우리의 현재 선택에 따라 우리가 졸업한 뒤에 대학에 들어올 신입생들의 학교 생활이 달라진다. 또 기회는 놓치는 순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저조한 투표율로 당선된 대통령의 정책 집행을 뒤늦게 막으려 하니 돌아오는 것은 가차 없는 물대포 세례다. 지금 이 순간의 침묵과 무지는 죄가 될 수 있다.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행동 없는 말은 누구나 다 한다. 어설프게 사회 참여를 촉구하는 현학자의 말이 얼마나 공허한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시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근원으로, 기초로 돌아가라고 한다. 진부하지만 그만큼 맞는 진실이기 때문에 진부해질 정도로 반복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무엇을 위해 우리가 안전한 대지가 아닌 풍랑이 거센 바다로 떠나야 하나. “인간 본연의 직분은 사는 것이지,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 있다. 삶의 주인공은 ‘나’지만 꼭두각시처럼 움직일지 스스로 팔다리를 움직일지는 선택에 달려 있다. 조나단 웨스토버는 말했다.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새 땅을 경작할 수도 있고, 잡초가 자라게 내버려둘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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