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5월 대전에서 한 아기의 백일 잔치가 열렸다. 갓 부모가 된 이들은 들뜬 표정이었고 축하하러 모인 친구들도 떠들썩 했다. 이들은 고교 동창들로서, 졸업 뒤 각자 군인으로, 경찰로, 교사로, 새마을금고 직원으로, 검찰공무원으로 일하던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갓 세상을 만난 ‘아람이’의 100일을 축하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고, 여름 방학에는 각자 쌀 한 말씩 거둬 고교 은사와 야유회를 가자고 약속하며 헤어졌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백일 잔치에 함께 했던 이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도덕교사였던 친구는 자정까지 학교에 남아 기말고사 채점을 하다 사라졌고 새마을금고에서 일하던 친구는 직장에 들이닥친 건장한 사내들이 끌고 갔다. 이들의 고교 은사는 보충수업을 하다 ‘학부모가 면회 왔다’는 말에 교실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딸을 위해 백일잔치를 열었던 젊은 군인은 영문도 모른 채 군법재판에 회부됐다.

이들이 끌려간 곳은 경찰 ‘대공분실’이었다. 그 곳에서 보낸 30여 일은 지옥이었다. 옷을 벗기고 수갑을 뒤로 채운 뒤 무릎 밑 오금에 곤봉을 넣고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려 발로 곤봉을 밟아 누르는 ‘무릎 골절빼기’, 발톱을 발로 밟아 부수는 ‘발톱 짓이기기’, 입안에 손을 넣어 양 턱을 잡아 당기는 ‘턱빼기’, 책상에 거꾸로 매단 뒤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붓는 ‘물고문’,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구타.

고교 동창이었던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 삶의 의지도, 우정도, 선생님에 대한 존경도 모두 사라지는 것을 느꼈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 지옥을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까에 본능적으로 매달렸”다. 그 결과 친구 딸의 백일 잔치는 반국가단체 ‘아람회’ 결성모임으로 둔갑했고 이들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계엄법 위반으로 2~10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친구도 가족도 삶도 모두 무너졌다. 한 친구는 지난 1998년 마흔둘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그리고 2009년 5월, ‘아람회’ 사건의 재심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고문과 협박에 의한 허위자백은 증거가 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일상을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던 시민들이 국가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구금과 혹독한 고문 끝에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 조작돼 허위자백을 했다고 절규했지만 당시 재판관들은 그 호소를 외면했다. 본 재판부는 오욕의 역사가 남긴 뼈아픈 교훈을 가슴 깊이 되새기면서, 억울하게 고초를 겪으며 힘든 세월을 견뎌 온 피고인과 가족에게 심심한 사과와 위로의 뜻을 밝힌다. 피고인들은 이 땅에서의 여생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재판부는 덧붙였다.

한때 20대의 젊음 속에 빛났던 이들의 주름 가득한 눈매에서는 연신 눈물이 흘렀다. 판결을 마치고 퇴정하는 재판부에게는 박수가 쏟아졌다. 1981년 5월 17일 화창한 봄 햇살 아래 열렸던 한 백일 잔치의 진실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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