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엄] 17~19세기 동아시아, 한·중·일 간 지식교류 양상
이번 학술대회에서 그는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중국의 지식교류가 어떻게 전개됐으며 조선과 일본의 ‘이성적 대화’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 원인과 과정을 조명했다. 임 교수는 “17~19세기에는 상호 대등한 관계 속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이성적 대화가 한·중·일 간 부분적으로 진행됐다”며 “동아시아의 흔들린 조공질서가 이를 가능케 했다”고 말했다.
그는 먼저 17~19세기 조공질서가 흔들리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17~19세기는 동아시아의 역사 전환점이기도 했는데, 일본은 에도시대가 도래했고 중국은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됐다. 그는 “역사 전환점에 처한 동아시아에 서양 문물이 유입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조선이 공식적으로 서양 문명과 처음 접촉하게 된 것은 1631년 조선사절단이 중국 산둥반도에서 서양 선교사 로드리게스를 만나면서부터다. 임 교수는 “이를 통해 조선은 중국이 세계 중심임을 의심하게 되는 사상적 변화를 겪게 됐다”고 설명했다.
조공질서가 흔들리면서 동아시아 각국은 상하관계에서 상대적으로 평등한 관계로 변모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성적 대화가 이뤄질 수 있었다. 19세기 청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다룬 『사대고례』는 범례의 한 조항에서 ‘대국이 중점이 된 경우는 중국의 연호를 쓰고 우리나라가 중점이 된 경우는 우리의 연자를 쓴다’는 것을 서법의 원칙으로 명시하고 있다. 임 교수는 “조선이 조공체제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에 매몰되지 않고 나의 경계를 발견하고 균형을 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임 교수는 조선과 일본 간 이성적 대화가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도 살펴봤다. 그는 한자 문명권에 속한 조선과 일본에 중국 고대 경전이나 한문학 작품이 보편적 교양으로 통용됐다는 점, 17세기 이래 통신사의 왕래로 일본의 지식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을 그 배경으로 분석했다. 그는 “한·중·일 간 경계를 넘어선 지식정보의 유통은 이성적 대화를 여는 필요조건”이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세계를 하나의 권역으로서 그 특성과 실상에 즉해서 인식하기 위한 시도’로 기획된 이번 콜로키엄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통기억’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지식정보의 유통은 이성적 대화를 여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롯해 동북아역사재단 등 ‘동아시아’ 학술대회는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유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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