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엄] 17~19세기 동아시아, 한·중·일 간 지식교류 양상

한시와 한문고전 번역전문가로 민족문화사연구소 상임고문을 역임 중인 임형택 교수(성균관대 한문교육과)
사진: 성재민 기자
지난 21일(목)에 열린 규장각 콜로키엄에서 임형택 교수는 ‘17~19세기 동아시아, 한‧중‧일 간 지식교류 양상 - 이성적 대화의 열림을 주목해서’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임형택 교수는 동아시아의 전통문화와 현대문제를 연구하는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원장과 성균관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교육연구단장을 역임한 고대 동아시아 지역 전문가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그는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중국의 지식교류가 어떻게 전개됐으며 조선과 일본의 ‘이성적 대화’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 원인과 과정을 조명했다. 임 교수는 “17~19세기에는 상호 대등한 관계 속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이성적 대화가 한·중·일 간 부분적으로 진행됐다”며 “동아시아의 흔들린 조공질서가 이를 가능케 했다”고 말했다.

그는 먼저 17~19세기 조공질서가 흔들리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17~19세기는 동아시아의 역사 전환점이기도 했는데, 일본은 에도시대가 도래했고 중국은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됐다. 그는 “역사 전환점에 처한 동아시아에 서양 문물이 유입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조선이 공식적으로 서양 문명과 처음 접촉하게 된 것은 1631년 조선사절단이 중국 산둥반도에서 서양 선교사 로드리게스를 만나면서부터다. 임 교수는 “이를 통해 조선은 중국이 세계 중심임을 의심하게 되는 사상적 변화를 겪게 됐다”고 설명했다.

조공질서가 흔들리면서 동아시아 각국은 상하관계에서 상대적으로 평등한 관계로 변모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성적 대화가 이뤄질 수 있었다. 19세기 청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다룬 『사대고례』는 범례의 한 조항에서 ‘대국이 중점이 된 경우는 중국의 연호를 쓰고 우리나라가 중점이 된 경우는 우리의 연자를 쓴다’는 것을 서법의 원칙으로 명시하고 있다. 임 교수는 “조선이 조공체제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에 매몰되지 않고 나의 경계를 발견하고 균형을 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임 교수는 조선과 일본 간 이성적 대화가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도 살펴봤다. 그는 한자 문명권에 속한 조선과 일본에 중국 고대 경전이나 한문학 작품이 보편적 교양으로 통용됐다는 점, 17세기 이래 통신사의 왕래로 일본의 지식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을 그 배경으로 분석했다. 그는 “한·중·일 간 경계를 넘어선 지식정보의 유통은 이성적 대화를 여는 필요조건”이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세계를 하나의 권역으로서 그 특성과 실상에 즉해서 인식하기 위한 시도’로 기획된 이번 콜로키엄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통기억’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지식정보의 유통은 이성적 대화를 여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롯해 동북아역사재단 등 ‘동아시아’ 학술대회는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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