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얼마 전 기록적인 폭설이 한반도 곳곳에 설경을 펼쳐 놓았지만, 어느새 땅위에는 잔설조차 남아 있지 않고, 따스한 황사바람이 교정을 메우고 있는 요즘은 분명 봄이다. 봄을 알리는 또 다른 풍경은 12시 무렵이면 식당마다 장사진을 이루는 학생들의 모습일 것이다. 학생회관에서 학생들과 어울려 새학기를 몸으로 느끼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지난 학부시절이 추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대학에서의 수업과 고등학교에서의 수업을 구별시켜주는 첫 번째의 것은 수업 시작 전에 교수님께 반장의 구령에 맞춰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고, 보다 핵심적인 두번째 차이점은 수업 중에 ‘비판’이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비판이라는 행위는 화자가 특정한 관점을 갖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더불어 특정한 관점은 특정한 이념적 성향을 바탕으로 하게 된다. 따라서 토론상대방 또는 비판대상의 관점을 인정하는 태도와 본인 역시 특정한 관점을 취하고 있음을 자인하는 태도가 비판행위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고, 수업에 앞서 교수님에 대한 권위적인 인사의례를 생략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대학수업에서 교수님들이 균형감은 물론이거니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사회나 행위주체에 대해서 ‘비난’하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행위는 배설행위에 불과하다.

“피아(彼我)를 부정하고 어떻게 아(我)를 주장하겠는가”
자신과 다른 관점을 인정하는 ‘톨레랑스’ 갖춰야

최근에 책을 내신 한 교수는 집필동기에 대해 말하면서 학생들이 좌파 학자들이 쓴 책만을 읽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엉터리 답안만을 쓰는 현실에 충격을 받아 출판을 결심하게 됐노라고 말했다. 좋다. 좌편향된 시각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우파적인 시각에서 대항비판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교수가 만약 자신과 같은 학자들은 사실을 기초로 논리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되먹지 않은 좌파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는 다른 관점을 가진 상대를 부정하고 자신만이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반쪽 인간에 불과한 것이며, 그의 출판행위는 비난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러한 ‘비난’행위가 학자로서의 양심이라는 허울 속에 감춰진 채 수업 중에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대학이 균형 잡힌 대학생을 배출하는 대신 특정 이념적 편향에 사로잡힌 반쪽 지식인만을 대량으로 양산시킨다는 점이다.

진정한 비판이 실종된 교실이 초래한 결과는 이라크 파병문제나 대통령 탄핵문제 나아가 송두율 교수 사건이나 국가보안법 논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참담하다. 아(我)와 피아(彼我)의 관계에서 피아(彼我)를 부정하고서 어떻게 아(我)만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송두율 교수의 질문은 송두율 자신에 대한 변호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균형 잡힌 관점에 대한 호소이기도 하다. 혹, 여러분은 홍세화씨가 열심히 팔고 다니는 ‘톨레랑스’라는 상품을 알고 있는가? 그것은 상생(相生)의 바램이며, 진정한 비판행위의 출발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감히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에게 톨레랑스 구입을 강권한다. 누군가 대학을 졸업할 때, 비판능력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동안 학교에 지불한 기성회비는 제외된 수업료로 톨레랑스를 구입한 현명한 구매자일 것이다.

김준현 행정대학원ㆍ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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