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1호 5월 25일자 5면
“‘칼뱅주의’의 빛과 그림자” 기사를 읽고

탄생 500주년을 맞은 칼뱅. 절약과 금욕을 강조해온 그는 오늘날 한국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막스 베버는 그의 대표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소명의식이라는 직업윤리를 통해 물질의 축적을 달성할 수 있었으며 이는 자본주의의 토대가 됐다고 밝혔다. 오늘날 전 세계의 주류 경제체제인 자본주의는 칼뱅의 새로운 신학 해석과 그의 금욕주의, 절제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500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여전히 자본주의는 득세하고 있으며 그 흉흉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물질문명의 축복과 재앙의 두 축을 왕복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혁명을 꿈꿨던 독일의 사회학자에 의해 잠시 그 세력이 주춤하기도 했으나 모진 풍파를 다 이겨내고 한국사회에서 견고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검약과 절제로 최고 권좌에 오른 현 대통령은 아마도 칼뱅을 찬양하고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예법과 질서에 대한 확고한 유교문화가 체내 깊숙이 배어 있는 한국인들은 근면과 성실을 최고의 기치로 삼아 오늘도 아침이슬 맞으며 출근해 밤 공기 맡으며 퇴근한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직업은 하느님이 재능에 부여한 것이니 우리는 부름을 받았으므로 당연한 것이리라.

헌데 우리는 왜 노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해 타인과 경쟁하며 동료가 아닌 경쟁자로 살아야 하는 오늘, 450여년 전 칼뱅이 기성 교회에 저항하며 주창했던 프로테스탄트는 이제 우리에게 기성 제도에 프로테스트(저항)하라고 요구한다. 더 큰 자본을 획득하고 큰 이윤을 얻어 상대 자본가를 무너뜨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치열한 경쟁의 정글에서 우리는 제어할 수 없는 생존욕구를 참아내지 못한다. 인간에 대한 도의는 없고 승리를 향한 법칙만 존재하는 삭막한 현실에서 패자는 곧 도태를 의미하며 모두가 그 법칙을 체화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타인을 무너뜨리고자 ‘노동’하고 타인에게 무너질까 불안해하며 승리에 이르지 못해 좌절한다. 그것이 ‘우리’의 직업이다, 하느님의 소명에 의한.     

과연 칼뱅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타인과의 경쟁 이전에 나를 굳건히 하는 힘을 갖춰라. 하느님의 부름에 적절히 응답하는 칼뱅의 직업관에 신중히 귀 기울어야할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칼뱅의 금욕이란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참아내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을 참으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소비를 통한 욕구충족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통한 욕구를 금지하는 것이 칼뱅의 금욕은 아니었을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금욕을 되새겨 볼 일이다.


신문수
식물생산과학부·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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