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수진(건축학과 석사과정)


1. 서론

차이나타운은 그를 둘러싼 복잡한 문화적 지형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커뮤니티보다도 명확하고 단일한 특징을 갖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종종 그 특징은 인천 차이나타운의 경우에서처럼 ‘붉은 색 포장재’와 ‘용 문양’(진린 외, 2004)으로 대표되는 시각적 상징을 통해 구체적으로 명료해진다. 인천 차이나타운을 찾는 관광객들은 100년 이상이나 지속된 인천 화교의 오랜 거주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실제로 화교들이 거주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관광 책자는 차이나타운이 ‘1884년 청나라 영사관이 설치된 후 중국인 2,000여 명이’ 모여 들었으며 ‘현재 600여 명의 화교가 거주’하는 사실을 인천 차이나타운의 중요한 특징으로 언급하지만, 현재 관광지로 재개발된 차이나타운 일대에서 실제 그 흔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파란(靑)’ 페인트가 칠해진 가로, 그리고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벽화로 그려진 화교 학교 주변의 ‘삼국지 거리’이자, 19세기 말 상상 속 청관(靑館)과 ‘중국’이라고 하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중국풍 거리의 재현과 기념품점 건립 등의 차이나타운 개발 이면에는 사람들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아이들을 기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삶의 장소로서의 서가(西街, xǐjie, 화교들이 ‘차이나타운’ 대신 이 일대를 일컫는 말)가 존재한다. 그곳에는 여느 동네처럼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한 오래된 학교(인천화교중산학교)가 있고, 동네의 상(喪)을 관장하는 장의사가 있다. 사람들이 마작을 통해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가 있고 서울로 떠난 부모를 대신해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돌보는 할아버지의 집 또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차이나타운은 장소만들기(place-making)의 관점에서 도시계획의 중요한 쟁점과 연관되어 있다. 즉 차이나타운에서 '중국문화'가 '시각적 상징'으로 재현되는 방식은 곧 도시공간에서 문화가 해석되고 재구성되는 방식에 관한 문제 그 자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핵심은 도시계획의 결과물로서의 시각적 상징물이 종종 문화의 왜곡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있다. 마치 인천 화교가 앞서 언급한 여러 시각적 상징물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19세기 말 청관거리의 중국인'으로 정체화되고, 인천 차이나타운이 '인천 화교의 삶의 현장'이 아니라 '한국 자장면의 고향'으로 관광지화되는 것과 유사하다.

본 연구의 목적은 차이나타운의 사례를 통해 장소의 문화적 해석과 재현의 문제가 비단 물리적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뿐 아니라 커뮤니티가 사회적으로 재현되는 방식에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도시계획이 커뮤니티의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 이를 일종의 상징적인 디자인으로 환원하고 상품화하는 것이 어떤 문제를 가지는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대부분의 정량적 연구에서 제시되는 커뮤니티의 거시적 모형이 실제 커뮤니티 개념의 복잡하고 다양한 유형을 설명해낼 수 없고 무엇보다도 문화적 해석과 재현이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도시계획에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방법론적 대안으로 본 연구는 약 3개월간 두 곳의 차이나타운에서 참여관찰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를 토대로 분석을 수행하였다.


2. 이론적 배경

1) 도시계획과 문화관광의 부상

도시의 매력이 도시경쟁력과 더 나아가 경제력의 향상에 직결된다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도시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관광'이 부각되었다. 이는 경쟁의 단위가 기존의 국민국가에서 도시로 바뀌고 도시적 삶의 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을 배경으로 한다(이무용, 1997). 즉 도시는 '창조도시' '문화도시' '문화예술축제', '디자인도시' 등 문화예술을 주된 도시개발전략으로 취하게 된다. 이렇듯 도시개발의 중요한 전략이 된 '문화'는 문화생산과 소비를 위해 필요한 '하부구조'를 필요로 했고 따라서 '문화지구', 박물관, 공연장, 극장 등의 문화시설물 등의 건설이 촉진되었다(이무용, 1997; Evans, 2003).

도시개발의 문화전략은 오늘날 여가문화가 발전하고 관광객의 태도가 바뀌면서 관광개발의 유형이 변화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조광익 외, 2002). 새롭게 등장한 관광의 유형으로 '신관광'이 등장하는데, 이는 지역의 색다른 문화와 상징들이 새로운 관광상품으로 개발된 것을 의미한다(Poon, 1994: 이종규, 이소영, 2002; 이정훈, 2005에서 재인용). 문화관광은 신관광 중 대표적인 사례로서 '새로운 문화체험',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이정훈, 2005) 등 관광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관광객의 요구에 부응한다.

2) 문화주도형 도시개발과 커뮤니티의 문제

그러나 이러한 관광과 도시개발의 문화전략은 문화의 상품화, 차이의 상품화라는 점에서 지적된다(Harvey, 2000). 특히 Evans는 도시가 건축행위로 도시이미지를 브랜드화하는 것을 '하드브랜딩'(hard-branding)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지리적, 상징적으로 확장된 '상품물신주의'를 비판한다. 즉 도시의 경제적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촉매제로 박물관, 공연장, 극장, 오페라 하우스, 콘서트 홀 등의 '문화' 시설물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지역적 맥락, 이를테면 지역주민의 배제, 도시개발 이익의 불평등한 수혜, 사업 자체가 갖는 물리적 효과의 부정적인 측면은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다(Evans, 2003). 이는 문화전략의 도시개발이 커뮤니티의 공간적 소외를 가중할 뿐 아니라 계급적, 인종적, 성적 불평등 등을 간과함으로써 문화적 왜곡을 낳는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Zukin, 2005).

3) 에스닉 커뮤니티와 문화적 상징

도시개발이 야기하는 문화적 왜곡의 문제는 에스닉 커뮤니티(ethnic community)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에스닉(ethnic) 혹은 에스니시티(ethnicity)는 기존의 인종(race) 구분이 생물학적 특징에 기초했다는 것과는 달리 언어나 관습 등 보다 문화적인 특징에 따른 구분을 지칭한다(조현미, 2006). 이때 에스닉 커뮤니티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주류 사회로부터 차별받는 것을 피하고 이들 커뮤니티에 구축된 사회적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기 위해 출신지역의 공통성을 매개로 특정 지역에 형성된 커뮤니티를 의미한다(Kwong, 1996; 조현미, 2006) 한편 도시개발에서 문화전략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에스닉 커뮤니티의 문화적 차이와 그들의 지역은 도시이미지를 차별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효과를 낳을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인식되어 관광지로 개발된다(Oakes, 1993; Rishbeth, 2001; Tyler, 2000; Henderson, 2000, Shaw, 2004).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되는 지점은 싱가포르 차이나타운의 재개발처럼 종종 특정 에스닉 커뮤니티의 문화가 도시계획 과정을 통해 왜곡되는 데 있다. 따라서 차이나타운과 같이 도시계획 사업을 통해 관광지로 재개발된 에스닉 커뮤니티의 장소는 '여러 흥미롭고 중요한 공간들을 간과한 인위적 조형물'(Henderson, 2000)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에스닉 커뮤니티가 종종 커뮤니티를 이해하지 못한 허구의 '테마파크(theme park)'로 비난을 받는 까닭은 바로 특정 에스닉 커뮤니티의 문화가 지나치게 상징적인 시각적 디자인으로 환원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Rishbeth, 2004). 에스닉 커뮤니티의 문화에 대한 시각적 상징물은 해당 문화에 특징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고 주류 사회에 에스닉 커뮤니티의 존재를 알리며 이들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전달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시각적 상징은 문화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양산한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3. 연구 방법

본 연구는 시각적 상징물에 대한 Rishbeth의 이론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인천과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사례를 통해 시각적 상징물이 커뮤니티를 문화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본 연구의 전제는 이와 관련한 도시연구가 단순히 시각적 상징물이 특정 커뮤니티에 대한 문화적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의 대안적인 문화적 재현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한편 문화적 재현에 대한 대안적인 방식은 커뮤니티의 문화에 대한 해석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연구자는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인천과 요코하마에서 약 3개월 동안 머무르며 참여관찰을 하는 연구 방법을 선택했다.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2009년 1월에서 3월까지 인천과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에서 약 3개월 동안 이루어진 현장 연구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현장 연구에 앞서 2006년 5월(인천)과 2008년 8월(요코하마)에 두 차이나타운을 방문하여 사전 답사를 거쳤고 이후 지속적으로 지역신문과 문헌 연구를 통해 차이나타운에 대한 언론의 태도 및 차이나타운 연구의 동향을 파악하였다.

요코하마의 경우 연구자는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바로 옆에 위치한 고토부키쵸의 아파트에서 1개월 동안 거주하며 참여관찰을 진행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미리 약속을 잡고 진행된 면접 대상자들과의 비구조적인 심층 인터뷰를 포함하여 현장노트 기록, 공공기관 방문, 관광책자 수집, 사진 기록 등이 포함된다. 인천의 경우 연구자는 앞서 언급한 참여관찰적 연구방법과 함께 인천차이나타운재개발사업에 대한 비공식적 단체 토론에도 참가하여 음성을 기록하였다. 특히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이틀 동안 인천화교 1세대의 장례식에 동석하여 발인이 이루어진 인하대학교 병원에서부터 운구, 매장이 진행된 파주군의 화교묘지까지의 과정과 이때 만난 다른 화교들의 증언을 사진과 노트로 기록하였다.

인천과 요코하마를 합하여 총 13명을 인터뷰하였지만 이 중 본 연구에 활용된 인터뷰 사례는 다음 표와 같다. 인터뷰 대상자로는 가급적 화교협회장, 교육자, 연구자, 사진작가, 상인, 중국인유학생, 화교학생 등 차이나타운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요코하마)

사례번호

나이

성별

직업

국적(특징)

인터뷰날짜

1

68

요식업

미국

2009.1

2

70

요식업

일본

2009.1

3

39

대학교수

일본(화교 2세대)

2009.2

4

55

화교협회장

일본(화교 2세대)

2009.2

5

49

연구원

일본

2009.2


인천)

사례번호

나이

성별

직업

국적(출생지)

인터뷰날짜

6

34

학생

대만(화교 3세대)

2009.3

7

54

사진가

한국

2009.3

8

60대

요식업

대만(화교 2세대)

2009.3

9

48

대학교수

한국

2009.2

10

47

지역활동가

한국

2009.2



이외에도 본 연구는 약 30명의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차이나타운에 대한 간략한 설문지 조사를 진행하였다. 또한 차이나타운의 상인들 가운데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미리 준비된 질문지에 서면으로 작성하는 방식을 취했다. 심층 인터뷰를 포함하여 설문지 조사와 서면 인터뷰의 질문 내용은 관광객, 상인 및 거주자, 전문가로 크게 나누어 주로 차이나타운의 변화에 대한 인식, 차이나타운에 대한 문제의식, 차이나타운의 시각적 디자인에 대한 반응, 차이나타운의 문화적 재현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심층 인터뷰는 상황에 따라 영어와 일어 및 한국어로 진행되었으며 본문에 인용된 인터뷰 내용은 영어와 일어의 경우 연구자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한국어 인터뷰 또한 발화 맥락에 맞게 일부 교정했음을 밝힌다.


4. 차이나타운의 도시적 맥락

1) 연구지역의 개관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요코하마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나카구 야마시타쵸(山下町)와 그 일대에 중화요리점, 중국식자재점, 중국잡화점 등이 분포한 약 200 평방미터의 구역을 일컫는다. 요코하마시 통계에 따르면,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나카구의 전체 인구는 2008년 12월 기준으로 요코하마시 전체 인구의 4퍼센트를 차지하는 약 14만 3천명에 이르는 반면 나카구의 중국인 인구는 약 8천 명으로 요코하마시 전체 중국인 인구의 26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는 일본 내에서도 등록외국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요코하마시에서 특히 나카구가 대표적인 중국인밀집거주지의 공간적 특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1923년 관동대지진과 1945년 2차대전 이후 상당 부분 거의 폐허가 되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전 5,700명이었던 인구가 지진 이후 고베, 나가사키 등으로 이주하고 심지어 중국 본토로 화교들이 귀국하게 되면서 일시적으로 200명으로까지 떨어지게 된다. 전후 미군의 점령과 항구 무역의 발달로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일대에는 선원과 군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서양식 술집들이 들어섰다. 이후 폭력과 마약, 술 등의 이미지로 인해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블러드타운(Carroll, 1994)’으로 불리며 일본사회에서 낙후하고 위험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인천시 중구 북성동 일대에 위치한 인천 차이나타운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 알려진 화교 집단 거주지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이 속해 있는 중구의 인구는 2007년 12월 기준으로 약 9만 3천명으로 인천시 전체 인구의 3퍼센트를 차지한다. 반면 중구의 중국인 등록 인구는 약 2천 8백 명으로 인천시 전체 중국인 인구의 12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구에 거주하는 화교는 1,023 명으로 대략 인천시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의 3분의 1 정도가 중구에 거주하고 있다(이윤희, 2004: 2003년 8월말 기준). 주로 산동성에서 이주해 온 재한화교는 '짱꼴라', '왕 서방'(최승현, 2007) 등의 경멸적 어휘로 불려 온 '배제의 역사(장수현, 2002)'를 가지고 있다. 화교의 눈에는 "평범하고 조용한(사례 3 인터뷰 내용 중)" 마을에 불과했던 인천화교의 거주지는 '항만과 미군기지와 공장과 술집과 가난이 뒤엉킨'('탄가루 날리던 해안촌 추억으로 울긋불긋 새 단장', 주간동아, 2008년 10월 22일자) 공간으로 묘사되어 왔다.

2) 차이나타운의 역사적 의의

각각의 차이나타운은 소재지인 나카구(中?)와 중구(中區)라는 행정구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요코하마와 인천의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해 왔다. 이는 개항장으로서의 배경을 갖고 있는 인천과 요코하마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즉 개항과 동시에 차이나타운은 청국조계지로 지정되어 인근의 다른 조계지역과 함께 근대적 의미의 도시계획이 처음으로 도입된 곳이다. 또한 차이나타운 바깥의 지역이 두 항구도시의 특성상 확장과 개발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인천과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그 형태와 경관에서 큰 변화를 겪지 않고 그 역사적 조직과 건물의 구성이 잘 유지되어 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편 두 곳의 차이나타운 모두 형성 이래로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일대에는 차이나타운과 관련한 근대유산뿐만 아니라 근대적 신문의 발상지(요코하마) 혹은 한국 최초의 현대적 호텔인 대불호텔(인천) 등의 근대 유산이 분포되어 있다. 건축과 관습, 문물 등을 포함하는 이질적인 문화가 그 안에 이식된 인천과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중국과 한국, 일본 각국의 관계와 상황 변화가 반영된 역사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미 해군으로 요코하마에 들어와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여 정착한 이후 현재까지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에서 'Windjammers'라는 이름의 바를 운영하고 있는 상인의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 차이나타운 커뮤니티 내부에는 차이나타운의 역사는 곧 요코하마의 역사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 바는 요코하마 전체에 속해 있으며 동시에 1970년대라는 또 다른 시대에도 속해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바는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는 이런 종류의 바가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 바는 차이나타운의 역사를 보여주며 동시에 요코하마의 역사를 보여준다. (사례 1)

요컨대 차이나타운은 근대적인 문물 및 제도, 이문화가 유입되는 장이었고 개항장이었던 인천과 요코하마, 더 나아가 한국과 일본의 근대적인 도시계획이 최초로 시도되었던 곳으로서 역사적 장소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다른 에스닉 커뮤니티는 달리 조계지 철폐와 거주 국가의 규제로 인한 공간적 쇠퇴와 함께 인천과 요코하마에서 소멸했지만,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온 화교사회야말로 차이나타운의 문화와 역사가 지속되게 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천과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커뮤니티의 오랜 역사와 이와 관련한 도시계획은 오히려 차이나타운과 그 커뮤니티의 특징을 규정하는 것이 그리 명확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5. 커뮤니티와 도시계획의 문제: 시각적 상징과 문화의 왜곡

1) 차이나타운과 도시계획

오랫동안 서구 사회에서 차이나타운은 비위생적인 주거환경과 비도덕적인 행위들이 난무하는 곳으로 여겨졌으며 성매매, 마약, 폭력, 도박과 같이 도시의 병폐가 집결된 ‘이방의 공간’이었다(Anderson 1987, Carroll 1994, Wong 1995, Tsu 1999, Wang 2003). 차이나타운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들은 서구의 커뮤니티가 '공원, 극장, 불이 환하게 켜진 가게'(Wong, 1995) 등의 도시 이미지로 설명되는 것과 대조되었다. 따라서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마치 '근대의 주변부'와도 같았던 이러한 차이나타운을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로변에서 상행위를 금지하는 조례를 채택(Fernando, 2007)하였고, 밴쿠버시는 중국인들이 주로 종사했던 특정 업종의 상점을 일정 구역 이외에서 금지하는 조례를 만들었다(Anderson, 1987).

그러나 도시개발의 패러다임이 문화전략으로 바뀌고 역사유산과 같은 도시의 문화적 자산이 중요해지면서 차이나타운은 한 도시의 역사와 다양성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으로 여겨졌다(Henderson, 2000). 또한 호주 정부의 다문화주의 정책과 이민법의 완화로 차이나타운이 다문화사회의 이상을 반영한 장소이자 관광자원으로 변형되었다(이창호, 2008)

차이나타운이 상징하게 된 '다문화성'은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요코하마의 도시디자인 전략으로 활용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 요코하마시는 중화가를 인근의 모토마치와 엮어 ‘중화가 모토마치 진흥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1970년대를 기점으로 일본 사회에 유행한 ‘구르메 열풍’은 중화가의 중국음식에 대한 선풍적인 인기로 이어져 '도쿄 디즈니랜드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찾는 최대의 관광지'로 부상했다. 이를 반영하듯 실제로 중화가의 가게는 1979년 226곳에서 불과 10 년 사이에 1989년 420곳으로 크게 늘어나 2009년 현재 540여개의 가게가 차이나타운에 위치해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이 도시계획의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청관거리복원계획’이 최초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현실적인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고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화교자본을 유치하려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1998년 송도에 차이나타운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인천 차이나타운이 본격적으로 재개발이 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2001년 영종도에 신공항이 건설되고 인천시가 21세기 ‘동북아의 거점도시’를 표방하면서 중구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부터였다(이창호, 2008). 인천시는 월미도와 인천 자유공원 및 북성동 일대의 근대역사문화환경을 한데 묶어 2001년 6월 26일 ‘월미관광특구’로 지정하면서 내에서 최초로 공식적인 ‘차이나타운’을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인천차이나타운재개발사업’이라고 명명하였다. 2007년 4월 27일 약 114,000 평방미터의 구역이 '차이나타운지역특화발전특구'로 지정되고 차이나타운 개발을 위한 자금 등 융자 관리 조례가 만들어진다. 2001년 차이나타운 재개발 사업을 기점으로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경제활성화에 대한 기대로 '자금성', '태화원', '태림봉'과 같은 화교들의 대형음식점도 들어서기('중구 북성동 차이나타운 옛 명성 되찾나', 인천일보, 2001년 10월 31일자) 시작한다.

2) 인천과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의 문화적 특수성

그림 2는 1940년대 이주한 인천화교 1세대 고(故) 유OO 씨 장례식 때 연구자가 찍은 것으로, 중국 산동성이 고향인 유씨 가족은 중국 본토에서도 현재 찾아보기 힘든 보수적 장례 문화를 고수하고 있다(사례 3 인터뷰 내용 중). 이는 재한화교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이 있다. 1949년 중화민주인민공화국(중국)이 설립되어 중국과 남한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당시 대부분 중국 산동성 출신이었던 재한화교들은 자동적으로 대만 국적을 부여받게 되었고(이윤희, 2004), 따라서 이들에게는 1992년 중국과 남한과의 국교가 재개되기 전까지 중국 방문이 허용되지 않았다. 즉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되고 거주국가로부터 끊임없이 문화적 정체성을 위협받는 과정에서 재한화교의 문화는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화교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나온 재한화교의 문화적 특수성을 설명해준다.

점점 차이나타운에 유입되고 있는 신화교는 이곳에 살고 있는 기존의 구화교들과 잘 지내지 못한다. 그들은 일본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중국에서 하던 것처럼 똑같이 할 뿐이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 예를 보여 주겠다. (밖으로 나가 맞은 편 채소가게를 가리키며) 저들은 저렇게 채소를 길 위에 내놓아서는 안 된다. 저런 행위는 보행자들을 위험하게 할 뿐 아니라 이웃한 다른 바와도 문제가 된다. 발전회에서 매우 자주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했지만 듣지 않는다. 경찰이 오면 일시적으로 물건들을 들여 놓지만 경찰이 가고 나면 다시 밖에 내어 놓는다. 이것이 오늘날 차이나타운의 문제이다. (사례 1)

<그림1> 신화교의 채소가게(요코하마 차이나타운)


만약 '중국풍' 문화라는 것이 실재한다면, 아마 채소가게를 운영하는 신화교가 훨씬 그것을 잘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길 위에 채소를 내어 놓으면 그것은 마치 더욱 중국 문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차이나타운의 축제에서 전통춤을 추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다. 나는 중국 문화라는 것이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는 '차이나타운'의 문화가 있을 뿐이다. (사례 3)

구화교는 일본적인 사고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또한 그들은 현실적으로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일본인과 친하게 지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일본 사회의 규칙을 준수한다. 하지만 새로 이주해 오는 신화교는 이와는 달리 사고 방식에 차이가 있다. 대다수가 돈을 벌 목적으로 오고 난폭하다.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규칙을 지키는 경우도 드물다. 이들은 이곳에서 오래 살 생각이 없기 때문에 화교총회의 회원이 되는 사람도 적다. (사례 4)

위와 같은 인터뷰 내용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차이나타운을 둘러싼 많은 오해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문화라는 것이 실재하고 있고 차이나타운이 그것을 재현하고 있거나 혹은 재현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믿음은 차이나타운의 커뮤니티를 단일한 성격의 문화공동체로 간주하는 오해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차이나타운 커뮤니티의 내부에는 신화교와 구화교 간의 갈등과 같이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에 따른 긴장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같은 '중국인'이라고 해서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차이나타운은 일본 혹은 한국이라는 이국에서 오랫동안 적응해온 화교사회의 문화적, 형태적 유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차이나타운과 관련한 도시계획에는 중국문화라는 상징이 아무런 의심 없이 재현되고 있다.

3) 문화적 재현과 시각적 상징의 한계

우리는 그곳을 서가(西街xǐjie)라고 부른다. 학창시절, 한 학년에는 한 반만 있었고 평균 50명의 학생이 한 학년에 있다. 이 중 5명 정도가 그곳에 살고 그 외는 인천 전역에 걸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곳은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모교나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사람들은 그곳을 차이나타운이라고 한다. 이 단어를 처음 접을 때가 고등학교 때였는데, 매우 생소했고 이질감을 느꼈다.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에 그 이질감을 피부로 절실히 느꼈다. (사례 6)

인천에서 태어나 '차이나타운'에 있는 인천화교학교를 다녔던 한 화교 3세대(사례 6)가 느낀 '이질감'은 바로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 재개발 사업의 문화적 재현과 관련되어 있다. 인천화교중산학교를 중심으로 차이나타운 내외부에 거주하고 있는 약 1000 명의 인천화교가 거주하고 있다. 커뮤니티의 이러한 현실적 맥락과는 달리 현재 인천차이나타운재개발사업이 공간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문화는 바닥재, 청국점포를 유도하는 건물 외관 디자인 가이드라인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청관거리'의 풍경들과 '중국풍' 거리를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시각적 상징물들에 기대고 있다.

<표1> 인천 차이나타운의 시각적 요소와 상징성(인천 차이나타운재개발사업 2001년 기준)


문제는 이러한 차이나타운 재개발 과정에서 적용된 시각적 요소들과 이들이 상징하는 '중국문화'가 현재 커뮤니티의 삶과는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최승현(2007)의 지적대로 한국사회가 화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이해가 "화교의 역사가 모두 중국에서 출발하였고 따라서 화교와 중국 사이에는 필경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주 당시의 출신 지역, 이주 시점, 교육의 정도, 현지인과의 혼혈, 중국과의 관계, 거주국가의 상황 등' 세계 각지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의 삶은 어느 것도 서로 같을 수 없다(최승현, 2007). 이러한 화교사회의 지역적 차이뿐 아니라 이민 1세대나 2세대, 3세대, 혼혈 세대 등의 세대별 이를 알지 못하고 세계 각지의 화교를 다 같은 "해외의 중국인"으로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화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전세계 화교네트워크의 자본 유치'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한국의 차이나타운재개발사업으로 구체화된다. 세계의 유명한 다른 차이나타운들을 외형적으로 베끼는 데에만 급급한 전국 각지의 차이나타운재개발사업은 결과적으로 '중국풍'이라는 근거 없는 이름으로 조성되고 있는 현재 차이나타운의 디자인을 낳았다.

이러한 커뮤니티의 삶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의 경우에서처럼 커뮤니티의 문화적 왜곡으로 이어진다. 이는 화교 3세대의 다음과 같은 증언으로 부연된다.

지금 재한화교는 4세대까지 이어오고 있다. 2세대가 곧 물러날 것이고 3세대와 4세대가 주축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현재 차이나타운이 복원하려고 하는 바로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중국은 다문화 다인종 국가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족(漢族)이 있다. 재한화교는 대부분 산동성 연해지역에서 온 한족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이념이 한국의 남북을 갈랐듯이 중국과 대만을 갈라놓았고, 이후 화교들은 92년까지 대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차이나타운재개발사업은 지금 인천화교가 오랫동안 만들어온 삶의 공간을 2세대조차 낯선 지금의 북경과 같은 관광도시의 이미지로 복원해 나가고 있다. 하물며 3세대, 4세대는 어떻겠는가? 이미 3, 4세대까지 내려온 화교들한테는 중국은 다른 나라와 같다. 다시 말해 차이나타운이 모방하는 것이 현재 중국의 관광도시라면, 차이나타운은 화교들의 삶으로부터 소원한 곳이 될 것이다. (사례 6)

즉 현재 인천차이나타운재개발사업이 문제시되는 것은 우선 화교사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커뮤니티의 현실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복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복원할 대상의 근거조차 명확하지 않은 이 사업의 핵심에는 표 1에서 정리된 것과 같은 '시각적 상징물'들이 있다. 이러한 시각적 상징물들은 그것의 명확한 상징성으로 인해 해당 문화에 대한 사전적 이해가 없는 외부인은 그 시각적 상징물들을 접하면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 즉 '차이'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게 되는(Rishbeth, 2004) 결과를 낳는다. 즉 이러한 경계에 대한 인식은 현실적으로 그 경계가 희미한 커뮤니티를 마치 그 경계가 뚜렷한 것처럼 규정하고 '나와는 다른 것'으로 사회적으로 구별 짓는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커뮤니티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시각적 상징물들이 종종 커뮤니티의 문화를 왜곡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문화적 왜곡은 한 장소가 사회적으로 재현되는 방식이 결과적으로 커뮤니티의 문화적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 그곳에 한국인 친구들과 같이 가기 창피하다. 차이나타운 재개발 이전에도 창피해서 일부러 인천역에서 만나지 않고 비교적 번화한 동인천역에서 만나곤 했다. 아마 그곳이 버려진 마을 같아서였을 것이다. (사례 6)

삼국지는 정사이지만, 삼국지연의는 소설이다. 그러나 현재 차이나타운에 그려져 있는 벽화는 소설인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벽화에는 이 그림이 '삼국지'에 등장한다고 적혀 있고 또한 이 벽화는 '삼국지 벽화'라고 불린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소설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마치 역사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오해한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나는 당혹스럽고 때로는 화가 난다. (사례 6)

요컨대, 인천 차이나타운의 '삼국지 벽화'와 같은 시각적 상징물은 이러한 '상징'이 대부분 커뮤니티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 잘못 해석되고 재현되기 쉽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 문화를 재현하는 시각적 상징물은 그 자체로 외부적으로는 커뮤니티에 대한 문화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재생산할뿐 아니라(Rishbeth, 2001) 커뮤니티의 복잡한 문화적 지형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도시계획에서 문화의 해석과 재현은 근거 없는 고정관념과 추측에 의존하는 시각적 상징성이 아니라 커뮤니티가 공간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하여 이를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 것이다.


6. 결론

오랫동안 차이나타운은 명백히 화교 커뮤니티와 동일시되어 온 물리적이며 상징적인 장소이지만, ‘차이나타운’이라고 하는 단어가 마치 서구의 주류 사회가 비주류인 중국인 이민자 집단을 인종적으로 구별하기 위한 차원에서 만들어낸 인위적인 개념(Anderson, 1987)인 것처럼 차이나타운은 인식 속에서 사회적으로 구축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 공간을 역사적으로 구축해 온 것이 비단 화교들만은 아니라는 점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즉 도시계획은 차이나타운에 대한 주류 사회의 편견과 오해를 공간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이를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 왔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사회적 편견과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것도 도시계획의 역할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의 세뇌로 “우리는 중국 사람”이라고 믿으며 자라왔다. 그러나 중국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대만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 중국과 대만에서는 한국인이, 한국에서는 중국인이 되어야 한다. 자라오면서 받아온 '세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사실 앞에 무기력해진다. 나는 동창회에서 이러한 질문을 자주 한다. “넌 네가 어느 나라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명쾌한 답변은 없다. 이것은 뿌리에 대한 인식이 없거나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곳에 ‘뿌리’를 박고 싶다. 점점 그곳을 떠나가고 있는 화교들이 찾아올 수 있는 뿌리 말이다. (사례 6)

현재 차이나타운의 가장 큰 문제는 새로 이주해 온 신화교가 구화교와 일으키는 갈등에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차이나타운의 문화와 역사를 배우려고 하지 않으며 오늘날 차이나타운 커뮤니티의 문제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러한 신화교의 이주가 궁극적으로는 차이나타운 커뮤니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이나타운은 늘 변화하며 그것이 바로 차이나타운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다만 오늘날 차이나타운은 커뮤니티 내부의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할 대화와 소통의 기술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차이나타운의 미래이므로. (사례 3)

차이나타운에 적용되는 도시계획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질문의 전제로 하고 연구자는 심층 인터뷰에서 차이나타운에 대한 미래에 대한 구상을 물었다. 이에 대한 답변인 위의 인터뷰 내용에서 보이듯, 현재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커뮤니티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커뮤니티의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커뮤니티의 자치역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단 차이나타운의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한국의 도시계획에서 커뮤니티 연구들은 커뮤니티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둘러싼 문제의식을 살펴보기보다는 주민참여의 활성화 방안과 같이 실행적 차원에서 도구적으로 쓰일 수 있는 일종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 주력해왔다(이승종, 2000; 박선영, 2006; 이륜정 외, 2008). 그러나 도시계획에서 커뮤니티의 참여를 논의할 때 더욱 중요한 것은 공청회, 설문조사 등의 방법과 같이 주민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적 참여가 아니라 도시계획이라는 갈등, 소통, 합의의 과정을 통해 커뮤니티의 자치역량을 보장하는 실질적 참여여야 할 것이다(Rechard et al., 2000; Burayadi et al., 2000).

본 연구는 현재 차이나타운에 적용된 여러 시각적 상징들이 대부분 화교사회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각적 상징물들이 커뮤니티의 문화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커뮤니티 연구가 커뮤니티 개념에 대한 한정적 논의에 기반해 있음을 지적하며 커뮤니티와 장소를 연구하는 대안적인 연구 방법론을 찾고자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참여관찰적 연구 방법으로 진행된 사례 연구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커뮤니티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비록 오랜 준비 과정에도 불구하고 현장 연구의 특성상 제한된 시간과 자료 조사의 과정에서 연구 질문이 재구성되는 등의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본 연구의 차이나타운 커뮤니티 분석은 한계가 많다. 또한 너무 방대한 양의 현실적 자료들을 이론적 차원의 논의와 정치하게 연계시키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차이나타운 커뮤니티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연구자 스스로 연구 질문이 새롭게 정리되고 커뮤니티를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본 연구가 갖는 현장연구로서의 장점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현장 연구의 경험이 또 다른 커뮤니티 연구에 적용되어 실제로 계획의 과정에서 활용될 수 있는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차후 다른 현장 연구를 통해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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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차이나타운 홈페이지 http://www.chinatown.or.jp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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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중구청, ‘한국문화와 중국문화가 공존하는 인천 차이나타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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