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인간 삶이 펼쳐지는 무대
철학적 기반 위 연구 토대 마련
도시문제를 해결할 단초로 활용

도시를 문학적·역사적·철학적으로 성찰하는 ‘도시인문학’이 떠오르고 있다.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된 한국에서 지난 수십 년간 도시연구의 주류는 ‘도시공학’이었다. 도시공학자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관리해야 할 공학적 대상으로 간주했다. 도시공학은 유입 인구를 예측해 주택과 도로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공학적 지식을 제공해왔다. 그러나 공학적 도시연구가 용산사태와 같은 첨예한 도시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다른 해결의 실마리를 주지 못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슬럼화 등 도시문제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도시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주목받고 있다.

도시인문학은 도시를 사람들의 ‘삶의 공동체’로 규정하고 도시를 이루는 건축물이나 교통체계가 아닌 ‘사람’과 도시 공간의 ‘질적 가치’에 집중한다. 박영균 교수(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는 “도시는 인간의 의미와 가치가 실현되는 공간”이라며 “도시문제는 도시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문(文)·사(史)·철(哲)로 대표되는 인문학적 연구는 기능적·양적으로만 이해돼온 도시 공간에 새로운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곳을 스쳐간 수많은 도시민의 자취를 좇기도 한다.

◇철학적 기반 위 연구 토대 마련=지난 4월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는 세 권의 도시인문학총서(총서)를 발간했다. 『도시공간의 인문학적 모색(1권)』, 『도시공간의 형성 원리와 도시민의 삶(2권)』, 『도시적 삶과 도시문화(3권)』 총 3권으로 구성된 총서는 연구소가 인문한국(HK) 사업의 지원을 받아 2007년부터 10년간 수행할 예정인 ‘글로벌폴리스의 인문학적 비전’이라는 연구의 성과를 담았다. 이 중에서도 철학적 개념을 빌려 인문학적 도시공간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인문학적 가치가 도시구획에 미친 영향을 밝혀낸 연구 결과가 있어 주목할 만하다.

서도식 교수(서울시립대 철학과)는 「공간의 현상학」에서 ‘사물의 공간’으로 인식됐던 공간을 현상학의 시각을 빌려 ‘의미의 공간’으로 바라봐 공간의 인문학적 연구가 가능토록 했다. 이번 연구에 쓰인 철학적 방법론은 현상학적 접근법으로 공간의 본질을 인간 삶의 터전으로 설명한다. 공간은 일반적으로 점·선·면으로 구성돼 단순히 사물의 생산과 교환이 일어나는 ‘사물의 공간’으로 인식됐다. 이 지점에서 인문학은 난관에 봉착한다. 공간에는 인문학이 연구해야 하는 인간의 삶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 교수는 현상학의 시각을 통해 기존 공간에 인간 삶의 터전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사물의 공간’을 ‘의미의 공간’으로 새롭게 인식고자 했다. ‘의미의 공간’은 인간 삶이 펼쳐지는 무대로, 이곳에서 인간은 인문학적 의미를 지니는 그들의 삶을 구축하고 그들의 역사를 축적한다. 이로써 도시인문학의 입장에서는 인문학적 의미를 지닌 공간을 연구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유승희 교수(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는 「조선시대 한양 도시구획과 공간의 위계화」에서 신분 간 구분을 중시했던 유교의 예치사상이 도시 공간의 위계를 결정했고 그에 따라 도시공간이 구획됐음을 밝혔다. 조선에서는 사회·문화적 유교화와 함께 도시 공간의 유교화도 함께 진행됐다. ‘높은 것은 북쪽, 낮은 것은 남쪽’이라는 위계가 명확하게 결정되는 유교 원칙에 따라 권위와 상징성이 높은 기관은 북쪽, 낮은 기관은 남쪽에 위치했다. 그 결과 한양의 북쪽에는 왕과 관료들이 머물렀던 궁성부와 관서부가, 남쪽에는 백성의 거주지역인 시전부와 촌락부가 자리 잡았다. 도시 공간이 조선시대 사상의 근간을 이룬 유교의 원리로 구획된 것이다.

◇도시인문학 학술대회=총서를 발행한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는 각종 학술대회도 활발히 개최하고 있다. 지금까지 11차례 도시인문학포럼을 개최했고, 지난해 10월에는 ‘아시아 도시의 기억과 문화’라는 주제로 제1회 도시인문학 국제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성백 소장은 “앞으로도 연례적으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올해에는 기존의 인문한국 사업과 함께 세계적인 석학을 초청해 도시 빈곤 문제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는 10월에는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주관으로 ‘인천세계도시인문학대회’가 열린다. 이번 학술대회는 ‘사람의 도시를 위한 인문학적 성찰’이라는 주제로 10월 19일부터 3일간 개최되며, 세계적인 건축사학자 앤서니 킹을 포함한 100여명의 국내외 학자들은 인문학의 도시 참여를 선포하는 ‘인천선언’에 서명할 예정이다. 인천세계도시인문학대회 김창수 사무국장은 “이번 학술대회는 도시문제가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는 가운데 전 세계 인문학자들이 모여 이를 ‘사람’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뜻 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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