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사람들 거주하는 도시
두 뜻의 살 권리 경쟁해
재산권자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살아갈 권리 보장돼야

김용창 교수
지리학과
지난 1월 용산재개발 과정에서 6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이력을 담은 책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유일한 잘못은 가진 것은 없지만 이 땅에서 꿈을 품고 희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며 살아가려 한 것뿐”이라고 외친다. 뉴욕타임스는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침체로 미국에서 하층민들이 기거하는 텐트촌이 급속히 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테네시주 내슈빌, 플로리다주 세인트피터스버그 등 10여 곳에 텐트촌이 들어서고 있으며,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에는 텐트촌 거주자가 2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게다가 서울뿐만 아니라 선진국 대도시에서 노숙자를 보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 됐다. 고도 문명사회라는 이 시대에 왜 이런 원시적인 일들이 만연하는 것인가.

도시에서 ‘살’ 권리에는 두 뜻이 경쟁한다. 하나는 도시에서 살아갈 권리다. 현대사회에서 도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도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꾸려야 하는 공간이고, 때문에 ‘살’ 권리가 있다. 다른 하나는 도시공간을 거래할 수 있는 권리로서 살 권리다. 자본주의 도시화는 토지와 건물을 생산하고 판매해 막대한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서 도시화는 사고팔고를 반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과정일 뿐이다.

1980년대 이래 도시정책에서 도시재생이라는 수단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불로소득을 쌓으려는 논리만이 도시재생의 유행을 지배하고 있다. 뒷날은 생각지도 않은 채 뉴타운 공약을 내건 후보에게 ‘묻지마’ 투표를 하고, 자기 집이 건축안전진단을 통과하지 못해 곧 무너지게 됐다고 ‘경축’ 플래카드를 내거는 진기한 현상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도시공간은 재산권 담론과 재산권자만의 목소리가 지배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편향성이 있다. 2005년 코네티컷 주 뉴런던시의 도시재생에서 공용수용권 발동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중요한 판결이 있었다. ‘화이자’라는 유명 제약회사의 연구시설 건설 사업이 공익에 해당한다고 해 강제수용을 허용한 것이다. 부연방대법관 스티븐스가 작성한 다수의견은 비록 사적이익을 위한 개발이지만 경제적 공익개념에 부합한다고 본 것이고, 이에 대해 오코너 대법관은 이러한 강제수용의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대기업과 개발회사를 포함해 정치과정에서 커다란 영향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비판하는 반대의견을 냈다. 아름다운 도시재생 조감도 아래 숨은 대자본의 편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재산권 보호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특히 공간시장과 자본시장이 통합되면서 도시개발에서 금융자본의 개입증가로 도시공간은 개발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정비․재개발돼야 할 공간으로서 의미만을 부여받고 있고, 도시생애주기를 강제적으로 단축시켜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결국 우리는 늘 ‘갈등 친화적’인 도시지역에 살고 있다.

그러나 도시공간은 재산권자만의 공간이 아니다. 서울시장이나 대통령은 재산소유자만의 지지로 당선된 것이 아니며, 세입자의 선거로도 당선된 것이기에 무엇보다도 이들도 도시에서 살 권리가 있고 발언권이 있는 것이다. 개발업자와 부정한 동맹을 끊는 동시에 ‘공간은 부자, 주민은 가난’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철폐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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