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으로 침묵하는 대학
강요된 침묵보다 더 해로워
사회적 약자와의 공존 위해
성찰하는 자세 가져야

이기영
행정학과 석사과정
루이 페르디낭 셀린의 1932년 소설 『밤의 끝으로의 여행』에서 주인공 바르다뮈는 “죽느냐, 거짓말하느냐, 이것 외에 인간에게 열려진 다른 선택은 없다” 고 말했다. 이 말에 따르면 살아있는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강요당한다. 거짓말은 사실을 위장하는 것만이 아니다. 침묵도 거짓말이 될 수 있다. 침묵은 공동체에 의해 강요된다. 가령 군대 공동체에서 동성애자임을 당당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피해자에게 성폭행 책임을 일정부분 전가하는 사회에서 피해 사실을 밝히기 어렵다. 자신에 대한 거짓말은 자존감에 상처를 남긴다. 입을 열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최선의 치유책이다. 성적소수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고통을 겪은 사람은 이를 언어화함으로써 정신적 외상을 극복한다. 강요된 침묵을 붕괴하고 자신에 대해 권위를 부여하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효과도 있다.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침묵, 위선적인 순응도 거짓말이다. 침묵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문제를 인식하며 침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을 거부해 발생하는 침묵이다. 강요된 침묵이 전자라면, 후자는 자발적 침묵인 셈이다. 문제를 인식하더라도 정치적 발언의 기회비용이 커지면 입을 열기 어렵다. 공동체가 권위적이고 경직적일수록, 합리적 비판자를 트레바리로 비난할수록, 정치적 입장에 대한 책임감을 원론적으로 추궁할수록 정치적 발언은 줄어든다. 자발적 침묵은 강요된 침묵보다도 공동체를 해친다. 강요된 침묵은 변화를 위한 잠재력을 축적하는 기제일 수 있다. 까뮈는 반항은 부조리의 응시에서 비롯된다고 했는데 자발적 침묵은 비판의 시작인 응시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을 초래한다. 공동체에 대한 의심, 불만, 호기심, 관심 없이 갈등을 회피할 때, 공동체의 문제는 ‘사라진다’. 무관심과 비성찰은 아렌트의 연구에서 보듯 살인을 일상화하는 관료조직사회를 낳을 수도 있고 공동체를 해체하기도 한다.

공동체의 기형적 유지나 붕괴는 반드시 명시적, 잠재적 희생자를 낳는다. 그래서 문제다. 최근 대학에서는 스스로를 비정치적, 무정치적 존재로 규정하는 친구들이 느는 것 같다. 공적 영역에 대한 관심은 불필요한 것이 됐다. 성희롱 문제는 ‘여성주의자가 아니니까’, 철거민, 장애우 문제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니까’, 환경오염은 ‘환경주의자가 아니니까’의 이유로 무관심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소매치기는 ‘경찰이 아니어도’ 잡을 수 있고, 지하철 선로에 빠진 사람은 ‘119요원이 아니어도’ 구할 수 있다. 자신이 숨 쉬는 시공간에 대한 성찰이 귀찮고 ‘사람답게 사는 것’에 따르는 비용이 아까운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자발적 침묵의 거짓말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셀린은 “이 무시무시한 폭풍 속에 그토록 굳세고 외롭게 혼자 있는 가엾은 당신, 매 순간 내가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라오. 우리는 지금 칼날 위에 살고 있소”라 했다. 가족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가족의 해체에 가장 크게 상처받듯, 모순이 축적된 공동체에 희생되는 것은 공동체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다. 말할 수 없는지 말하지 않는지에 대한 고민이 매 순간 공동체와 함께 살아있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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