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어’를 알려 드립니다

세계화 등의 사회적 변화로 시장, 시민사회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
개념 자체의 모호함과 다층성으로 인해 충분한 사례 분석 필요

『대학신문』은 4개의 개념어를 소개하는 연재를 준비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추천한 개념어와 시중의 개념사 시리즈 주제어로 선정된 개념어 중 역사적으로 개념어를 둘러싸고 학자들 간 치열한 논쟁이 벌어져 온 단어로 선정했다. 최근 사회과학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개념어 중 하나인 거버넌스를 비롯해 다중, 시민권, 젠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본 연재에서는 선정된 개념어들의 어원적 풀이와 함께 의미의 통시적 변화 양상을 검토하고, 이를 중요하게 다뤄온 학자들과 이론을 소개하며, 아울러 개념어들의 현재적 의미와 한국사회에 던지는 함의를 살펴보려고 한다.

최근 정치, 행정 등 사회과학분야에서 ‘거버넌스’ 단어 사용이 급증하고 있다. 촛불집회, 용산시위 등 한국 사회 전반의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는 현실에서 현 정부의 거버넌스 구축과 운영에 대한 논의의 중요성 또한 높아지고 있다.

‘거버넌스’는 ‘(키를) 조종하다 (Steer, Pilot)’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Kubernan’에 어원을 두고 있다. 플라톤은 ‘키를 조종하다’는 뜻의 단어를 은유적으로 정부 통치에 적용해 ‘통치체제의 설계’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 단어는 다시 ‘규칙 만들기’ ‘조종하기’ 등을 뜻하는 중세 라틴어 ‘gubernare’의 어원이 된다. 이후 거버넌스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정부(government)와 동의어로 언급되고 ‘다스리는(gover-ning) 행위 또는 기구’ 등을 의미하는 등 정부와 거의 유사하게 사용돼왔다.

1960년대 독일의 정치학자 칼 도이치는 ‘키잡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Kubernetics’에서 나온 용어 사이버네틱스(Cybernatics)를 정치에 적용해 국가가 방향타를 잡는(Steering) 역할을 해야 함을 제시하고 거버넌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1970년대 이전까지 정부 부문의 지나친 확대에 따라 국가 실패가 대두하는 상황에서 미국 외교관 출신 학자인 할런 클리블랜드는 ‘더 작은 정부, 더 많은 거버넌스’를 해결방안으로 내세웠다. 이는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국민에게 제공하는 공공서비스의 확대를 통해 국정관리체계를 재정립하는 의미다. 이 시기에 거버넌스는 기존의 정부 외에 시장, 시민사회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를 통치 네트워크로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됐다. 즉 정부, 시장, 시민사회가 협력적 네트워크에 의해 이해와 갈등을 조율하며 통치하는 의미다.

1980년대에는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 등 국제기구들이 제3세계 국가들의 사회통합체계와 국정관리능력 강화 방안으로 다양한 정치참여주체의 협력뿐만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성 공유를 모색하는 ‘좋은 거버넌스(Good governance) 이론’을 논의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가이 피터스는 ‘정부가 없는 거버넌스(Go-vernance without government)’ 현상을 포착했는데 이 시기에 정부 이외의 시민사회, 시장 등 새로운 정치참여자가 정부의 동등한 협력 파트너로 부상했다. 신자유주의에 따라 정부가 통일된 하나의 명령체계에서 독립된 책임운영기관으로 운영방식이 변화되면서 정부 안에서도 협력과 협상이 필수적이 됐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과 맞물려 시민사회의 영역이 확대되고, 정보화, 세계화 등의 추세와 함께 정치권력의 분권화가 활발해지면서 거버넌스에 대한 관심이 증대됐다.

1990년대에는 정부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참여를 더욱 확대해 민주주의적 요소를 거버넌스에 포함하고 지구 온난화 등 국제적 이슈에 대한 초국가적 협력 체제를 의미하는 글로벌 거버넌스, 지방자치 행정을 강조하는 로컬 거버넌스 등 거버넌스 논의가 다양한 방면으로 확장, 분화됐다. 1992년 『정부 혁신의 길』(Re-inventing government)의 저자 미국의 데이비드 오스본과 테드 게블러는 수직적, 관료제적 정부에서 분권화된 ‘기업가적 정부’는 노젓기(Rowing)가 아닌 방향 잡기(Steering)로 정부의 역할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는 특히 IMF 위기 이후 정부의 공적 부문이 축소되고 시장,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 민간 부문이 확대됐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 시민사회를 정부와 국정 관리에서의 협력적 파트너로 격상해 참여를 독려하는 ‘참여형 거버넌스’를 지향한 바 있다.

거버넌스 연구가 개념 자체의 모호함과 다층성으로 인해 이론으로서 완성된 실체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안네 메테 키에르는 거버넌스 이론의 이질성에 대해 “많은 병에 하나의 상표를 붙여, 여러 생산자가 자신의 음료를 각자 채워 넣는 것”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또 한국에서 거버넌스 연구가 충분한 구체적 사례 분석이 뒷받침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상대적으로 시민참여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지역 행정을 중심으로 로컬 거버넌스에 대한 사례 연구가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적 환경이 시민사회, NGO, 다국적 기업 등 다양한 세력의 목소리가 더욱 확대돼 기존의 정부 논의로는 더 이상 새롭게 바뀐 환경을 포괄할 수 없는 만큼 거버넌스 개념어의 유효성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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