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물신주의와
「빵과 장미」·「자유로운 세계」의 비참한 노동 현실
자본주의 굴레 아래 상실되는 인간성

삽화: 유다예 기자 dada@snu.kr

1. 빼앗긴 인간성, 무책임한 자본주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감독: 신동일, 2008)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물신숭배를 꼽았다. 인간 노동의 산물에 불과한 자본이 고유한 힘을 갖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결국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질이 생명을 얻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 외의 다른 가치는 생명력을 잃고 물질로 환원된다.

영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사랑과 우정 같은 최소한의 인간적 가치마저 물질로 환원돼버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조명한다. 잘나가는 외환딜러 예준은 가난한 그의 친구 재문과 그의 아내 지숙을 재정적으로 도우며 가깝게 지낸다. 하지만 어느 날 갓 태어난 부부의 아이를 잠깐 봐주던 예준의 실수로 아이가 질식사하게 되면서 자본에 얽힌 그들의 종속적이고 불평등한 관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건의 전모를 모르는 지숙은 예준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떠나고 재문은 2년간 교도소에서 예준의 죗값을 대신 치른다. 예준은 자기 대신 교도소에 들어간 재문이 출소한 것을 알고도 지숙에게 함께 미국으로 떠날 것을 제안한다. 예준과의 새로운 미래를 잠시 마음먹었던 지숙은 예준과 재문의 대화를 엿듣고 진실을 알게 된다. 지숙은 광기에 사로잡혀 그들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끝내기 위한 방화를 시도하고 자본에 얽매인 셋의 관계는 끝을 맺는다.

모든 가치가 물질에 집중된 사회에서 그들의 우정은 순수할 수 없었다. 예준이 지숙에게 “누구 덕에 살고 있는데!”라고 소리 지를 때 그들의 관계는 선명해진다. 순수해야 할 우정이 자본주의적 계급구조에 결박돼 있음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의 관계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종속적이고 불평등한 그들의 관계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속박돼 헤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다.

물질만능 사회는 ‘가진 자’의 물질외적 가치도 좀먹는다. 한 때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를 꿈꾸던 운동권 학생 예준은 끊임없이 경쟁하며 남을 밟고 올라가는 삶을 살고 있다. 모순된 삶을 사는 그는 자괴감과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질 이외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삶을 꿈꿀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모든 이가 자본의 굴레에 사로잡힌 현실은 비상식적인 상황을 초래한다. 영화 속 예준이 아이를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모습에서 1988년 탈옥범 지강헌의 외침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500만원을 훔친 자신보다 600억원을 횡령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형기가 더 짧다는 것에 분개했던 그의 절규는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 돈이 있기에 이건희 전 삼성회장은 끊임없이 무죄고, 돈이 없기에 용산 철거민들은 죽어가면서까지 유죄다.

교도소에서 나와 받은 새하얀 두부를 보며 재문이 말한다. “내가 뭐 죄졌냐?”고. 자본을 가졌기에 살인 앞에 무책임할 수 있었고 자본을 통해 면죄부를 얻어낼 수 있었던 그의 친구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돈이 없어 죄인이 된 재문은 끝내 “빈말이라도 미안하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소리친다. 그러나 재문 앞에 버티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사과 한마디 없이 무책임하다.

2. 자본이 만들어 내는 악순환의 필연

「빵과 장미」 (감독: 켄로치, 2000),
「자유로운 세계」 (감독: 켄로치, 2007)

자본주의가 창출한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기이한 생산관계는 거대자본의 순환체제 속에서 필연적으로 서로를 이용하고 이용당하게 한다. 더욱이 1970년대 이후 대두한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가속화되고 있는 탈규제와 노동시장 유연화는 우리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고통받는 약자를 대변해 온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는 불법 이주노동자들이 기업의 불합리한 억압을 타파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쟁취하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멕시코에서 온 불법 이주노동자 마야는 한 기업체의 청소부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최소한의 생존권조차 요구할 수 없는 비정규 노동 환경에 반기를 든다. 마야는 노조를 결성해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친다. ‘빵’은 생존권, ‘장미’는 의료보험, 안전 보장 등과 같은 인권을 의미한다. 그들은 고용주의 식사를 방해하거나 기업합병 파티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등의 투쟁을 벌이게 되고, 마침내 그들은 ‘장미’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승리를 자축하기도 전에 마야가 멕시코로 강제 추방되면서 그들의 희망은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

켄 로치의 또 다른 영화 「자유로운 세계」는 시장경제 체제에서 고용자가 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준다. 동유럽  이민자들을 영국으로 취업시키는 인력송출업체의 직원인 엔지가 하루아침에 해고되면서 그녀는 직접 인력송출업체를 운영하게 된다. 하지만 경제난에 부딪히게 되면서 엔지는 변한다. 불법이주 노동자들에게 연민을 느껴 먹을 것을 챙겨줄 만큼 따뜻했던 엔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당사자가 된다. 결국 영화 「자유로운 세계」에 자유로운 세계는 없다. 자유시장이 자유로운 세계를 구현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자본주의는 우리 모두의 삶을 옥죄여 온다. 결국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 살고 있음을 영화는 폭로한다.

두 영화 속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속해 있는 악순환의 고리는 우리의 현실에서도 엄연하다. 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고용주들과 살기 위해 착취당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 모두 자본주의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경영난으로  말미암아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된 350명의 비정규직자들은 쌍용자동차를 점거해 폐업을 유도했고, 쌍용차비정규직지회 부회장은 공장 굴뚝에 올라가 연일 농성을 벌였다. 이랜드 사태와 기륭전자 파업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실의 비정규 노동 문제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해준다.

오늘날 거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약자인 노동자들에게 과연 ‘빵’과 ‘장미’가  주어지는 날은 언제쯤 오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 모순된 구조 속에서 진짜 ‘자유로운’ 세계가 실현될까. 믿음을 갖고 변혁을 시작하라고 이 영화들은 말한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