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서평] 종교 문제의 철학적 사유

“짐승은 먹이나 번식을 위해 싸울 뿐이지만,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려고 싸운다.”

그래픽: 김지우 기자 nabarium@snu.kr

사산된 신

마크 릴라 지음
마리오 옮김
바다출판사
334쪽 / 1만7천원
홉스는 인간이 전쟁에서 짐승도 하지 않을 만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신을 믿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종교전쟁의 폐허를 목격한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의 힘으로 신의 섭리를 대체하고자 노력했고, 19세기 후반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근대 철학자들의 희망과 달리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종교적 열정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21세기 들어 오히려 그 불꽃은 다시 지펴지고 있다.

전 세계에서 신의 이름으로 여전히 전쟁과 테러가 벌어지는 가운데 그 용의자인 ‘종교적 열정’을 숙고한 두 철학자의 책이 최근 번역[]출간 됐다. 미국 정치철학계의 거장인 마크 릴라의 『사산된 신』과 『냉소적 이성 비판』의 저자로 유명한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신의 반지』는 종교문제의 해결책으로 각각 ‘정교분리(政敎分離)’와 ‘문명화’라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며 치밀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한다.

◇정교분리만이 신의 사산을 막을 수 있다

마크 릴라는 『사산된 신』에서 오늘날 분쟁의 씨앗을 통찰하기 위해 해묵은 논쟁거리를 다시 꺼낸다. 그것은 지난 수백 년간 서구 철학계와 신학계를 뜨겁게 달군 ‘정치신학’ 논쟁이다. 근대 들어 철학자들은 정치에서 신학을 분리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합리적 정신이 태동하면서 정치적 결단을 하늘의 계시에 맡기는 것의 불합리함을 깨닫고 종교를 정치에서 떼어내려 한 것이다.

신의 반지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두행숙 옮김
돋을새김
275쪽 / 1만2천원
중세 유럽 사회를 지배한 신학-정치적 악순환의 고리를 처음 끊은 것은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였다. 홉스는 ‘신의 뜻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은 왜 종교를 믿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논쟁의 중심을 신에서 인간으로 치환했다. 그는 종교의 존재 이유를 인간의 무지와 공포에서 찾으며 종교를 오로지 인간적인 현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홉스의 영국과 달리 유럽대륙에서는 어떻게든 종교와 정치를 조화시키려는 제3의 길이 적극적으로 모색됐다. 마크 릴라는 여기서 비극이 잉태됐다고 판단한다.

프랑스 사상가 루소는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에게 종교의 유익을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유익이란 ‘도덕성’이다. 그는 『에밀』에서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이상 종교는 지속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정서나 양심에 뿌리를 둔 신앙은 ‘도덕 종교’로서 인간 정신에 유익하다고 판단했다. 칸트는 도덕 종교의 기반을 더욱 견고히 다졌다. 그는 기독교가 바르게만 개혁된다면 인간의 도덕성 향상에 가장 적합한 종교라고 주장했다. 칸트에게 이성적 인간은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최고의 선은 신의 존재와 인간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두 가지 공리를 받아들일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신교가 ‘절대지(絶對知)’라는 인간 지식의 정점에 이르렀으며 독일은 개신교 중심의 도덕 생활을 통해 인류의 화합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상적 바탕 위에 19세기 독일에서 낙관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종교가 바람직한 사회 건설에 기여할 수 있고 정치를 위협하거나 광신주의를 불러일으킬 일은 없다고 낙관했다. 또 이들은 예수의 신성은 부인하되 복음의 도덕적 메시지는 합리화해 근대 정치와 문화생활에 적용하고자 했다.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독일의 전쟁 기도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재앙으로 독일 부르주아 사회가 무너지면서 이를 지지하던 자유주의 신학도 함께 몰락하게 된다. 자유주의의 부푼 꿈은 궁극적인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진정한 확신을 심어줄 수 없는 ‘사산된 신’임이 드러난 것이다. 부르주아 생활에 대한 진부한 도덕관과 역사적 낙관론으로 점철된 자유주의 신학은 애초에 “왜 기독교인이 돼야 하는가?”라는 신앙의 근본적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선 극도의 정치·사회·경제적 혼란 속에 다시 인간을 성서 속 구원의 신, 구세주 하느님과 화합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났다. 독일은 자신의 몰락을 가져온 신학을 정치에서 완전히 배격하는 홉스의 지혜를 선택하기보다 새로운 신학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구원에 대한 강렬한 갈증을 해결해줄 새로운 계시였다.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고자 했던 바르트와 로렌츠바이크의 메시아주의적[]종말론적 구원사상은 독일에서 정치적 구원에 대한 신학적 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악용됐고, 이는 결국 신격화된 히틀러를 만들어내며 20세기 최악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마크 릴라가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과 그들의 신이 사산된 역사를 되짚으면서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제3의 길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철학과 정치신학을 구분하는 강은 좁고 깊다”며 “그 물에서 파도타기를 시도하는 이들은 통제 불능의 영적 세력에 휩쓸려 내려갈 것”이라고 말한다. 신은 개인의 영성 생활 안에 머물러야 하며, 신이 정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사회는 극단적인 메시아주의가 도래할 잠재적 위협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 열성을 버려라

마크 릴라가 우려하고 경고한 정치-신학적 비극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충돌하는 중동은 그 갈등이 유례없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지역이다. 페터 슬로다이크의 『신의 반지』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세 종교가 일신교라는 점에서 포착하고, 세 일신교의 평화로운 공존을 제안한다.

이 책의 원제는 『Gottes Eifer』다. 여기서 Gottes는 신을, Eifer는 열성을 뜻한다. 중동의 분쟁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극심한 것은 일신교가 열성적 종교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만을 따르는 유일신교는 최고 존재의 유일성과 완전한 권능을 강조하는 종교적 보편구제설을 따른다. 따라서 일신교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교에 대한 질투와 경쟁심이 내재해 있다. 이러한 열성은 ‘팽창을 통한 세계 수용’으로 이어져 역사적으로 ‘원정(遠征)’이라는 형태로 표출됐고 오늘날까지도 그 열성이 전 세계의 미래를 불안하게 한다.

책의 부제이기도 한 ‘세 일신교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제안’은 책의 표제인 ‘반지 설화’를 통해 제시된다. 반지 설화는 독일 극작가 레싱이 1779년에 발표한 희곡 『현자 나탄』의 한 일화로 저자는 이것만큼 일신교들을 우호적으로 ‘길들이는’ 계획은 없다고 말한다. 반지 설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신과 인간들의 호감을 얻게 해주며 그 소유자의 상속권을 증명하는 ‘신의 반지’가 있었다. 반지를 가진 아버지는 세 아들에게 모두 반지를 물려준다고 약속하고, 이를 지키고자 원본과 똑같은 두 개의 모조품을 만들어 물려준다. 아버지가 죽자 세 아들 사이에 상속권 다툼이 벌어지고 이들은 재판관을 불러 판결을 요구한다. 판사는 반지가 겉보기엔 모두 똑같기 때문에 자신의 행실을 통해 진짜 반지의 상속자임을 입증하라고 판결한다.

반지 설화를 단순하게 이해하면 세 반지의 소유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다. 유일신교인 이들이 자신의 종교가 진짜임을 입증하는 방법은 오직 자신들의 ‘행실’로 대중들의 평가를 받는 것뿐이다. 지혜로운 판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지 설화가 발표된 후 지난 200여년간 그 시나리오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가장 큰 장벽은 역시 ‘열성’이었다. 열성주의자들은 대중이 진리의 절대적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일신교가 가진 엘리트주의적 특성 탓에 그들은 오히려 반대로 행동했다. 열성주의적 일신교들은 자신들의 반지가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하는 힘’이 있는 것처럼 경쟁하며 반지 설화의 수정판을 만들어 냈다. 일신교는 애초에 이교도나 우상숭배자 없이는 성립될 수 없고, 일신교의 위상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저항이 필수적인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드러내야만 자신을 부각시킬 수 있는 일신교들은 서로 맞서 더 오랫동안 싸우기 위해 서로를 너무나 필요로 했다. 이때 세 일신교의 공존 본질은 ‘대립’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세 일신교의 평화적 공존을 위해선 본래의 반지 설화로 돌아와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한때 계몽주의적 종교가 돌파구로 모색됐지만 프랑스 혁명기 공포정치는 그것에 내재한 광기와 열성을 드러냈다. 『사산된 신』이 지적하듯 그들이 낳은 것은 사산된 신이었다. 네 번째 반지로 의심됐던 공산주의 역시 파국적 말로를 맞았다. 가능한 것은 오로지 세 반지가 ‘열성’을 누르고 비열성적 문화종교로 거듭나는 것이다.

저자는 세 일신교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은 ‘문명화’라고 말한다. 그는 다가(多可)적인 사고를 통해 문명화로 나아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가적인 사고란 ‘나 아니면 이단’이라는 일신교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세 번째 가능성은 있다고 인정하는 것’, 저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회색을 취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 본보기로 ‘코란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일가성 열성을 고수하던 이슬람의 사례를 든다. 그들은 사실상 개종하지 않고도 복종하는 디히미(Dihimmi, 이슬람 국가의 비모슬렘 시민)를 허용함으로써 흑과 백 사이의 ‘제3의 것’을 선택했다. 제3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동로마제국 인구의 절반을 잃게 한 이슬람의 팽창 정책은 인류역사상 가장 큰 유혈 사태를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신의 반지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충고

기독교 중심으로 쓰인 『사산된 신』과 『신의 반지』는 기독교인이 30%에 이르는 한국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특히 세계 10대 교회 중 5개가 한국에 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한국 개신교도의 열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들의 열성적 선교활동은 교세 확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그 배타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기도 했다.

그들은  정치적 보수세력의 한 축을 이루며 강력한 정치권 발언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현 정권 들어 기독교계의 보수 인사들이 현 정부 정책의 각종 자문을 맡아 정치에 참여하고, 일부 공무원의 부적절한 언행으로 종교차별 논란이 이는 등 종교의 정치 간섭 논란이 심화되기도 했다. 한국 사회와 교회가 두 저자의 주장을 무조건 추종해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정교 결합’과 ‘열성주의’를 심각하게 경고한 두 책을 진지한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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