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유다예 기자 dada@snu.kr

요즘 각종 매체에서 구술사 연구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술사 일부가 공개됐고, 스포츠와 예술계에서는  원로 스포츠인·예술인의 구술생애사가 유행이다. 이렇게 구술사 프로젝트 홍수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은 ‘구술사가 정확히 무엇이냐’는 물음에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다. 지난 6월 한국구술사학회의 창립과 함께 구술사 연구의 양적 성장이 기대되는 지금, 구술사란 무엇이며 그 의의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기억’의 구술사 - 말은 펜보다 생생하다

“내가 자식도 자식 같이 한 번 못 낳아보고 남편도 남편 같이 한 번 만내가 못 살아보고. 이 세상을 내가 짓밟히고 살아온 걸 생각하면 분해서, 분해서 못 살겠십니더. 지금도 부르르 떨리고, 그 말 나오면 속이 떨리고….”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에는 1940년경 위안부로 팔려나갔던 김창연(가명) 할머니의 오랜 한이 직접 듣는 듯 생생히 묻어나온다. 구술사 텍스트는 이야기 내용뿐 아니라 방언, 어조까지도 최대한 살려 표정, 몸짓, 심정까지도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들을 그려나가는 역사

‘구술사(Oral History)’라는  용어는 20여년 전 한국 학계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후 그 활용 빈도가 꾸준히 높아져 왔다. 그러나 공식적인 구술사의 정의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지난 6월 5일 한성대에서 열린 한국구술사학회 창립 학술대회에서 사용된 정의를 살펴보면, 김귀옥 교수(한성대 사회학과)는 구술사를 ‘어떤 사람들의 기억이 구술을 통해 역사적 자료로서 지위를 부여받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래도 구술사의 정체가 여전히 모호하게 느껴진다면 종종 구술사와 혼동되는 증언과 비교해보자. 한국구술사학회 초대 회장 함한희 교수(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는 증언과 구술사에 대해 “동의어가 결코 아니면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포함하는 것도 아닌 관계”라고 설명한다. 우선 증언의 범위는 과거의 사건은 물론 현재의 사실 증명까지도 포함한다. 반면 구술사가 다루는 내용의 범위는 과거의 기억에만 국한된다. 증언과 구술사의 차이는 각 용어를 역사와의 관계에 비춰볼 때 더 두드러진다. 증언은 특정 가설을 지탱하는 증거자료로서 이미 만들어진 역사를‘떠받치는’ 수동적 성격을 가진다. 이와 달리 개인의 기억으로부터 역사라는 공적 경험의 체계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것이 구술사다. 구술사는 특정 가설을 미리 세워두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개인의 기억을 풀어내기 때문이다.

◇구술사 연구의 토양이 된 알박스와 아날학파

1900년대 초 유럽과 미국에서 먼저 시작된 구술사의 학문적 기반은 프랑스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와 아날학파에서 찾을 수 있다. ‘기억사회학’을 창시한 알박스는 개인의 기억을 ‘사회·역사 연구에 활용 불가능한 신빙성 없는 것’으로 치부하던 당시 분위기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개인 기억’은  추상적으로만 존재할 뿐 의미가 없으며 기억은 본래 ‘집합 기억’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기억 행위가 일어나는 상황, 과정, 그리고 회상하는 내용은 당시 ‘사회적 틀’안에서 획득된 공통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구술사는 개인 기억을 집단 기억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된다.

한편 아날학파의 ‘일상사’ 연구의 관점 및 방법 역시 구술사의 그것들과 상통한다. 그들은 국가·정치체제·법칙이 아닌 개인의 일상에서 사회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했다. ‘거대한 숲’만 바라보던 역사의 눈을 ‘숲의 나무들’로 돌려 연구대상과 주제를 다양화한 것이다. 또 일상사 연구의 방법으로서 구술채록은 그야말로 적격이었다. 개인과 직접 일대일 대면을 통해 무수한 일상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기록을 남기고 관리하는 주체는 대부분 힘 있는 엘리트 집단과 지배 계층이었다. 그래서 구술사의 대척점에 있는 문헌사, 즉 기록의 역사는 지배계층의 가치관이 반영된 역사임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문헌사에서 배제돼 온 개인들과 피지배계층의 역사복원은 기억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에 알박스와 아날학파는 기억을 사료로, 개인을 연구대상으로, 구술채록을 연구방법으로 ‘격상’시키며 구술사가 자라날 토양을 간접적으로나마 마련했던 것이다.


‘민중’의 구술사 - 말은 펜보다 아름답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로서의 구술사 - 진상 규명 + α

1980년대 초 『뿌리깊은 나무 민중자서전』이 국내 구술증언집 발간의 첫 신호탄을 쏜 이후 국내 구술사는 짧은 역사에도 굵직한 연구 성과를 축적했다. 민주화 운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문민정부가 출현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를 기점으로 ‘과거사 진상 규명’이라는 목적하에 각종 구술증언집이 쏟아진 것이다. 독재체재가 완화되고 사회 전반에 걸친 권위주의 군사정권의 그림자가 걷히자 그동안 묻혀 있던 민중의 아픔이 구술사로 재현됐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 5월 민주항쟁의 기록』, 제주 4·3 사건을 다룬 『이제야 말햄수다』, 반민특위 피해자들의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등이 발간됐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은 지속적인 구술채록사업으로 이후 4권까지 출간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민주항쟁, 대량학살, 위안부 문제와 같이 중요한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들을 찾아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상당 부분 복원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말에 이르러 구술사를 민주화된 사회 구현을 위한 사적(史的) 자료로 인정하자는 사회적, 학문적 담론이 성공적으로 형성된다.

그렇다면 구술사의 가치는 문헌사를 보완해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만 그칠까. 구술사는 인터뷰 과정에서 구술자의 억눌린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치유의 효과’도 가진다. 서울대 기록원 관장 김기석 교수는 “구술사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라며 “구술하는 이의 주관과 감정, 한의 기저까지 파고들면서 문헌사와는 전혀 다른 역사서술을 보여주는 새로운 연구방법”이라 강조한다. 역사연구방법으로서 구술사는 문헌사 뒤켠의 ‘차선’이 아니라 나름의 독자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지난 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인 용산4구역 철거민들을 대상으로 한 구술사 프로젝트가 시행돼 구술사증언집 『여기 사람이 있다』가 4월 발간됐다. 이렇듯 현재 구술사는 사회적 약자의 ‘진상 규명’과 ‘치유’에 여전히 활용되며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구술사연구소 윤택림 소장은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됐다는 오늘날까지도 소외계층은 엄연히 존재하고, 현 정부 들어 사회갈등은 더욱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며 현재가 ‘아래로부터의 역사’인 구술사의 가치가 부각되는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2000년대 이후 구술사 연구가 급증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성격보다 문헌사의 보완에 초점을 맞춘 구술사들도 속속 등장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달 22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일부 공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술생애사 역시 권위주의 군사정부의 입김이 세던 시절 그가 남기기 어려웠던 문헌기록의 보완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구술사는 기록에서 소외당한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역사였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로서 구술사가 보듬을 수 있는 ‘민중의 아픔’은 아직도 곳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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