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개념어’를 알려 드립니다

지난해 여름을 뜨겁게 달군 촛불은 수많은 추측과 희망을 양산해냈다. 어떤 이는 직접 민주주의의 도래를, 어떤 이는 대중지성의 시대를 말했다. 한편에서는 이들과 더불어 ‘다중(多衆)의 등장’이 화두로 떠올랐다. 최근 들어 자주 들려오는 ‘다중’은 누구일까.

일반인들에게 다소 낯선 개념인 ‘다중’은 자율주의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함께 1990년대 말 한국에 입국했다.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과 함께 1997년 한국에 처음 소개된 ‘다중’은 2000년대 들어 네그리의 저작들이 활발히 번역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네그리의 다중 이론을 구체적이고 전면적으로 다룬 『다중』이 출간된 지 4년 만에 번역·출간되기도 했다.

‘Multitude’로 번역되는 다중(多衆)은 문자 그대로 ‘많은 무리’를 뜻한다. 다중이 정치적 주체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가 들어설 무렵부터였다. ‘민중(民衆)’과 함께 정치주체로서 탐구된 다중은 ‘주권(主權)’에 대한 태도에서 민중과 분명하게 갈라진다. 근대 국민국가의 구성원인 민중은 주권적 존재다. 이들은 자신의 주권을 통치기구에 위임하고  국가는 정당한 통치권을 획득한다. 사회주의 혁명에서도 민중은 스스로 주권을 행사하고자 했을 뿐 주권 자체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았다.

반면 다중은 위임 가능한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적이나 유랑 예술가는 근대 초 등장한 대표적인 다중이다. 그들에게 민족이나 계급은 무의미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세워진 통치기구에 권한을 위임할 필요성 또한 전혀 없다. 추방자들이나 노예들처럼 주권을 박탈당해 다중이 된 자들도 많았다. 홉스는 근대적 정치 체제의 안정적 성립을 위해서 다중을 민중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권의 위임이 불가능한 사람, 즉 지배기구의 통치권이 닿지 않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스피노자는 사람들을 수동적 존재인 위임자로서 머무르게 하는 민중 개념에 반발해 다중의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민중을 통치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다중에 의한 절대 민주주의를 꿈꾼 스피노자의 철학은 오늘날 네그리의 다중이론을 통해 계승된다.

역사는 스피노자가 아닌 홉스의 길을 걸었다. 노예해방처럼 다중을 민중으로 편입하거나 수감소를 세워 잠재적 다중을 민중으로부터 철저히 격리했다. 개념으로서도 민중은 다중을 멀리 밀어냈고 주권은 중요한 정치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판이 흔들리고 있다. 다중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다중의 등장은 제국의 등장과 궤를 함께한다. 네그리는 ‘제국이론’을 통해 오늘날 전 지구적 규모의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와 정보 경제의 성립을 통해 제국이 건설되고 있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과 함께 더욱 가속화된 제국화는 이전의 제국주의화와 완전히 다르다. 새로운 제국은 영토가 없다. 거대 초국적 기업과 전 지구적 소통 네트워크 형성으로 국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제국 안에서는 계급도 산란된다. 정보경제의 출현으로 생산방식이 다양화됐을뿐더러 생산은 지역적 집중화가 더는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이뤄지는 물질노동은 서비스업 중심의 비물질노동으로 전환되고 있다. 전 세계 노동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전 세계적 네트워크망으로 서로 소통하고 협조하며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이는 노동조합 사무실이 하나둘씩 사라질 것을 암시한다. 이로써 기존 정치체제를 지탱해온 민족-민중과 계급-민중은 해체될 것이다. 네그리는 그 자리를 다중이 채울 것이라고 예견한다.

다중은 대중매체와 거대 산업체제에 의해 형성된 수동적 ‘대중’과 분명히 구별된다. 다중은 민족성이나 계급성처럼 공동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자신을 하나의 특이점으로 인식한다. 이 특이점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다른 특이점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새로운 공통성을 구축한다. 이 특이점 간의 연결로 새로운 공통평면이 탄생하고 공통평면을 형성한 각 특이점은 적극적 교류를 통해 새로운 특이점으로 거듭난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중은 일종의 창발적 현상이다. 유럽에서 1968년에 일어난 문화운동은 다중의 귀환 가능성을 강렬하게 표출했다.

다중의 귀환 가능성은 한국에서도 최근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노동운동은 이미 힘을 잃은 지 오래고 민족담론도 그 열기가 예전 같지 않다. 그 대신 ‘촛불’이 등장했다. 촛불은 다중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전에 민중의 하나였던 각각의 특이점은 ‘광우병 위험’이라는 계기를 통해 상호소통하며 공통평면을 구축했다. 평면을 형성한 각 특이점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자신의 모습, 도로를 점거하고 아침이슬을 따라 부르며 광장의 자유발언대에 서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자율주의자들은 촛불에서 한국에서도 민족-민중과 계급-민중이 밀려나고 다중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말한다. 촛불이 과연 다중인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다중은 어느덧 묵직한 담론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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