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9/11」에 드리워진 미국의 검은 그림자
「수취인불명」의 비참한 기지촌 현실

미국 패권주의 아래 희생 당하는 인간성

 

그래픽: 유다예 기자 dada@snu.kr

1. 누구를 위하여 전쟁은 시작되나

「화씨9/11」 (감독: 마이클 무어, 2004)

2001년 9월 11일 뉴욕. 암전된 화면 속에서 빌딩이 무너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스크린을 흐른다. 영화 「화씨 9/11」의 첫 장면이자 9.11테러의 시작이다. 9.11테러는 중동의 반미 세력에 의해 납치된 민간 항공기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뜨리고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를 공격한 대참사였다. 반미주의와 세계전쟁을 분석해 온 영국의 학자 리차드 크로캇은 9.11테러에 대해 “반미주의는 9.11테러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말했다. 이처럼 9.11테러는 미국의 일방적인 외교정책과 패권주의적 모습이 불러온 증오와 적대감의 폭력적 표출이었고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은 전 세계적인 반전·반미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화씨 9/11」은 부시 일가와 오사마 빈 라덴 가문의 관계를 추적하고 이라크 전쟁의 원인과 미국의 위선적 대외정책을 폭로하는 영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재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석유회사를 운영했던 부시일가는 사우디 국적을 가진 15명의 테러 연루 용의자에 대한 수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고 석유, 군수 사업에서 이권을 쟁취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하게 된다. 

멕시코의 작가 겸 외교관을 지낸 푸엔테스는 미국을 “안에서는 민주주의 국가라도 밖에서는 제국주의 국가며, 자국에서는 지킬박사 같은데 타국에서는 하이드 같다”고 묘사했다. 지킬박사이자 하이드인 미국은 세계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냉전 종식 이후에도 민주주의의 탈을 쓴 채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6.25전쟁 이후 미국의 오랜 영향을 받은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국의 이러한 모습들은 부시정부에 대한 반감을 넘어 반미의식으로 발전한다. 부시정부는 석유, 군수산업을 위해 벌인 전쟁에서 한국군의 ‘자발적’ 파병을 강요했고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의 젊은이들은 테러의 위협과 전쟁의 공포에 시달렸다. 파병 이후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이 더욱 증폭됐음에도 정부에게 미국은 여전히 ‘포괄적인 전략적 동맹의 상대’였고 ‘자유민주주의 대표 국가’였다. 또 정부는 이런 허상적 미국의 모습을 통해 국민의 반미감정을 억누르려 했다.

그렇다면 한국정부는 왜 국민들이 갖는 반미의식을 두려워할까. 한국은 이라크로 파병단을 보내면서 미국이 시행하는 석유사업과 건설사업에 참여해 많은 이권을 얻을 수 있었고 국내의 많은 대기업 건설회사가 이라크에 진출하게 됐다. 정계의 많은 인사들이 재계의 인사들과 공생적 관계를 맺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 미국이 벌인 전쟁에 동조한 한국정부 역시 부시정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미국과의 관계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란 사실과 그것이 국민의 무고한 희생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정부는 반미감정을 억누르려는 것이다.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은 이미 8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또 다른 9.11의 씨앗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에게도 미국과의 관계 속에 생겨난 미군철수 문제와 SOFA, 북미관계 등의 외면할 수 없는 현실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화씨 911도로 타오르는 진실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다.


2.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사회

「수취인불명」 (감독: 김기덕, 2001)

1950년 한국전쟁 이래 한국에 주둔하기 시작한 주한미군과 미군기지, 그리고 기지촌 주민들은 우리의 아픈 근대사의 일부다. 어린아이들은 미군 트럭을 쫓아가며 껌이나 초콜릿을 구걸했고 먹을 것이 없던 아낙들이 군부대 음식들을 모아 부대찌개를 만들었다. 어린 시절을 기지촌에서 보냈다는 김기덕 감독은 영화 「수취인불명」으로 그가 경험했던 1970년대 기지촌을 회고했다. 그의 기억 속 기지촌은 황량하고 슬픈 삶만이 가득 차있다.

「수취인 불명」은 1970년대 미군부대와 인접한 마을을 배경으로  기지촌 주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가감 없이 그려냈다. 주인공 창국은 정신 쇠약인 어머니와 버려진 버스에 사는 개장수다. 그의 친구 지흠은 소심한 성격에 여기저기서 괴롭힘을 당하는 못난이다. 지흠은 한쪽 눈에 백태가 낀 은옥을 짝사랑하지만 은옥은 눈을 고쳐주겠다며 접근한 미군 제임스의 ‘양공주’가 된다.

창국의 어머니는 그녀를 버리고 미국으로 떠난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편지는 언제나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온다. 수취인불명인 것은 비단 편지 뿐만은 아니다. 현실의 ‘시궁창’에서 인간다운 삶을 부르짖는 등장인물들의 외침에도 세상은 수취인불명으로 답한다. 희멀건 백태눈, 눈앞에서 벌어지는 강간, 개의 피로 붉어진 창국의 옷가지들. 감독이 그려낸 기지촌 사람들의 모습은 이렇듯 답답하고 서럽게 역겹다. 모든 이들의 꿈은 목적지를 알지 못하며 보내는 편지처럼 희망 없이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오고, 상황은 더욱더 나빠질 뿐이다. 계속되는 좌절 앞에 그들은 무력해지고 비극적 결말은 탈출구 없는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

김기덕 감독은 「수취인불명」을 ‘친미와 반미의 경계에 있는 영화’라고 밝혔다. 김 감독은 기획 당시 ‘반미’의 관점으로 기지촌이라는 상황 속에서 주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미군을 비판하려 했지만 미군 또한 거대한 사회구조적 모순 속에서 피해자일 뿐임을 깨닫게 되면서 시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고 한다. 영화는 기지촌이라는 비정상적인 배경 안에선 모두가 피해자고 또 모두가 가해자가 된 상황을 그리며 자칫 개인에게 치중될 수 있는 책임을 사회로 돌린다. 은옥이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는 제임스에게선 가해자의 힘보단 피해자의 눈물이 묻어난다. 영화는 이국에서 고향과 따뜻한 사랑이 그리워 돈과 힘으로라도 얻고자 했던 한 개인을 연민하고, 나아가 그들을 극한으로 몰고간 거대한 지배구조적 사회를 비판한다.

비록 40년 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우리는 영화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건재한 미국 패권주의를 마주한다. 2002년 미선이·효순이의 비극을 접한 국민은 미국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SOFA라는 장벽에 부딪혀 좌절해야 했다. 대구를 비롯해 파주, 동두천 등지에 여전히 존재하는 기지촌에는 미군에게 몸을 팔며 생활을 이어가던 ‘양공주’ 할머니들이 등 붙일 집 한 채 없이 비참하게 살아가고, 그들과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여전히 주위의 차가운 시선에 시달린다. 이들의 비참한 삶을 책임지지 않는 미국과 무책임한 그들의 주둔을 허용하는 대한민국 앞에서 기지촌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직도 수취인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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