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물’을 통제하는 품격주의
격조 넘치는 시대의 역설
수준있는 품위란 위선의 부정
자신감 넘치는 분노 필요해

김원영
법학전문대학원 석사과정
부유하고 성적도 좋았던 내 고교동창은 당시 같은 반 아이들 가운데 외모가 형편없거나, 극도로 가난하고,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을 추려내어 하찮고 볼품없는 존재, 즉 ‘미물(微物)’이라고 불렀다. 이른바 미물론(微物論)이라 명명된 이 분류법은 그 아이들이 ‘미천하고 격 떨어지는’ 인간이라는 인식을 핵심으로 했다. 나는 장애인이었으므로 응당 미물에 해당돼야 했지만 그는 내가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미물에서 제외해주었다. 하지만 그의 기준에 따르자면 나는 분명 ‘미물’이었다.

나는 사회에서 대체로 미물로 분류되지 않는 서울대생이면서, 동시에 대표적인 미물인 장애인으로서 우리사회가 어떻게 미물들을 통제하는지 잘 안다. 물론 주된 방식은 내 동기처럼 미물들의 목록을 만들어 이들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품격주의’다.

품격주의는 자신이 왜 미물로 취급당해야 하는지, 왜 이토록 부당하게 대우받아야 하는지를 반문하는 사람들에게 고매한 자들이 하는 충고다. 내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도전, 억압된 욕망과 사랑에 대한 과감한 표현, 나를 배제하는 사회에 대한 합당한 분노. 그 모든 태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억압하는 방법은 “워워워- 품위 좀 지키세요”라는 조언이다. 일상에선 과감히 나서는 미물들에게 “괜히 나서지마, 나서면 더 추해”라는 명령을, 정치영역에선 어디도 호소할 데 없어 길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에게 ‘법치주의’ 시대에 격 떨어지는 행위 좀 하지 말라고 질타하는 것이다. ‘품격주의’가 녹아든 법치주의는 계몽주의 이후 발전해 온 국가권력 통제 기제로서의 법치주의가 아님은 물론이다.

품격 없는 미물로 분류되는 정체성을 가진 나로서는 고매한 중립주의자, 반쪽짜리 법치주의자, 전지적 작가시점에 올라앉아 세상을 향해 “품위 좀 지키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 앞에서 그야말로 격조 넘치는 시대의 역설을 경험한다. 법을 어겨 위장전입을 한 것이 밝혀졌음에도 청문회에서 ‘법치’를 강조하는 법무부장관 후보와 대법관 후보, 용산 한복판에서 일어난 최악의 참사를 방치하는 정부의 태도는 참으로 품격 넘치지 않은가? 최근 보건복지가족부는 중증장애인들이 불법시위에 가담하면 활동보조인을 중단해야 한다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 활동보조인은 신변처리가 어려운 중증의 장애인들의 생활을 보조해주는 사람들인데, 말하자면 보건복지가족부는 “너희들 집회 나가면, 화장실도 못가게 한다”는 협박을 한 셈이다. 서울대의 모 단과대 교수가 단과대 학생회에게 “아구창을 날려버리겠다”라고 말했다더니, 이에 비견할 만큼의 품격 있는 태도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지난주에는 이 품격의 원류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이 서울대에서 “품격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강연을 힌 비 있다.

나는 품격주의의 시대에서 ‘미물론’에 대항하는 길은, 스스로를 미물의 목록에서 구해내기 위한 품위유지가 아니라 명백한 부조리에 대한 자신감 넘치는 분노라고 생각한다. 분노만이 미물론을 종국적으로 논박할 수 있다. 아비샤이 마갈릿(A. Margalit)은 『품위있는 사회』라는 책에서, “품위는 재화의 평등한 분배를 강조하는 ‘정의’를 넘어 그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에서조차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들을 모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므로 진짜 ‘수준 있는’ 품위란 노골적인 위선과 고상한 법치주의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미물’들에 대한 모욕의 부정이요 그에 대한 분노다. 법대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는 나는 법치주의가 ‘품격 있는’ 국가를 내세우는 ‘미물’ 통제의 원리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남용과 모욕에 대응하는 ‘미물’들의 합당한 분노가 정식화한 것이라고 분명히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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