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고 파랗다 못해서 검은빛을 띠는 자연 그대로인 바다와 그 위에 떠서 유유히 흘러가는 유빙들, 그리고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웅장한 모습의 자태를 뽐내는 듯한 만년빙.” 이런 아름다움을 시기하듯 평균풍속 초속 18m, 최대 45m로 폭풍설이 며칠씩 불어닥치는 남극. 신비롭지만 혹독한 자연조건을 지닌 이곳에 설치된 세종과학기지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7월 21일 밤 기지 조리사가 총무로부터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사건처리과정에서 이 문제를 경미한 다툼 정도로 축소시키려 했다는 조직적 은폐·조작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폭행 장면이 담긴 CCTV 화면은 이미 삭제됐지만  피해자가 그 화면을 자신의 디지털 카메라에 담아 공개함으로써 자칫 묻힐 뻔했던 진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동영상에 담긴 폭행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야만적인 폭력보다도 더 당혹스러웠던 것은 기지 대장의 주도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는 점이다. 우선 CCTV 화면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혐의가 짙다. 그리고 공개된 동영상에 비춰볼 때 상황을 직접 목격한 대원의 진술내용과 기지 의사의 진찰결과는 어느 정도 조작된 것이라는 의혹이 들게 한다. 우리 한국사회에 아직도 이런 퇴행적 조직문화가 잔존해 있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이런 추문은 담당 상관뿐만 아니라 ‘우리 조직, 상급 조직, 대한민국 전체에 해가 되기 때문’에 덮어둬야 한다! 이런 논리 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과 정신이 짓밟히고 피폐해져 왔는가. ‘나’란 존재가 중요하지 않은데 ‘너’란 존재가 중요할 수는 없다. 한 개체, 한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조직의 미래는 나락이다.

그리고 더 당혹스러운 것은 사건의 발단을 폭행의 피해자에게 은근슬쩍 떠넘기려는 파렴치한 태도다. 세종기지 22차 월동연구대가 가해자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는 탄원서에는 조리사의 성격 이상이 제시돼 있다. 총무는 월동대 전체의 감정을 대신 표출한 것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맞을 짓을 했다는 표현이다. 좋게 생각하면 ‘지못미’로 인한 죄책감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합리화 속에서 만성화되는 집단폭력에 대한 면역이다.

이 글로 남극 세종기지에서 고생하는 연구대원들을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한국사회에서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만한 일이며 지금도 어디선가 강요된 침묵과 은폐된 폭력 속에서 고단한 자아를 추슬러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올해 초 민주노동당 성폭행 사건 은폐 시도가 큰 충격을 주더니 가을에는  유사한 사건이 알려져 다시금 우리사회의 조직문화를 반성해보게끔 한다. 내가 속한 조직에 혹은 내 안에 나약하고 비겁한 폭력의 싹이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되짚어볼 일이다.


장준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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