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 역사 살펴보기]

로마공화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까지

공화국의 역사는 기원전 5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폭정을 이유로 왕을 축출하고 권력을 손에 넣은 로마인들은 ‘공공의 것(Res publica)’이라는 이름으로 로마공화국을 수립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로써 로마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일치하는’ 최초의 국가가 됐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는 자신의 공화국을 ‘인민의 것(Res populi)’으로 규정했다.

로마공화국이 ‘공화’를 달성하기 위해 운영한 정치체제(정체)는 민주제가 아니라 혼합정체(Mixt)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상적인 정체라 일컬은 혼합정체는 일인정, 소수정, 다수정이 혼합된 정치체제다. 로마인들은 일반 민중이 선동적 지도자에 의해 쉽게 조작될 수 있다는 이유로 민주제를 이상적인 정체로 보지 않았다. 이는 키케로의 ‘인민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키케로가 말하는 인민이란 단순한 인간 군집이 아니라 공익을 실현하겠다는 목적을 가진 지도자, 귀족, 민중으로 구성된 특정한 인간 조직이다. 공화정 로마는 집정관, 원로원, 민회 제도를 운영하며 혼합정체를 현실정치에서 구현했다.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된 로마공화국은 강한 국가적 통합을 바탕으로 지중해 전역을 제패했다.

공화정 로마가 제정 로마로 넘어가면서 지구 상에서 공화국은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그로부터 수세기 후 다시 이탈리아 땅에 등장했다. 7세기 후반에 세워진 베네치아 공화국을 필두로 이탈리아 반도와 그 인근 지역에서 여러 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나폴레옹에게 정복되기까지 약 1천년 동안 지중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들 공화국의 혼합정체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베네치아의 수반, 원로회, 대회의는 지배 세력이었던 귀족들 내부에서 권력 분점을 위한 수단이었고, 다른 도시공화국에서는 특정 가문이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쇠망의 길을 걷고 있던 1789년 머나먼 신대륙에서 미연방 공화국이 수립됐다. 신생 독립국 미국의 지식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혼합정체 정신을 최대한 구현하고자 했고, 이는 미국 정치체제에 그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두 명의 집정관과 원로원, 민회로 이뤄진 로마의 혼합정체는 정·부통령제, 상·하원의 양원제로 계승됐다.

지구 상 대다수의 나라가 공화국이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독립한 신생 국가 대부분이 공화정을 채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공화국이 세워지게 됐을까. 공식적으로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 15일 수립됐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민주공화제를 내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가 1919년 4월 상해에서 세워졌다. 놀라운 것은 임정 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써 한다”를 의결한 임시의정원에서도 이 대목에 대한 토론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지 불과 9년 만에 이미 공화제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공화제는 18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소개됐으나 당대에는 입헌군주제가 대세였다. 군주제가 엄연히 작동하고 있었고 민중의 정치적 의식 수준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입헌군주제론이 공화제론으로 기운 결정적 계기는 1910년의 경술국치와 1911년의 중국 신해혁명이었다. 500년 역사의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고 청나라에서 혁명을 통해 공화국이 들어서자 한국에서도 공화제가 현실로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1917년에 해외 독립운동세력들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국민이 승계했음을 선언하는 ‘대동단결선언’으로 이어지고, 1919년에 임정이 헌법을 통해 한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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