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1Q84』

올해 한일 출판계 최대 화제작인 『1Q84』
그러나 하루키의 ‘진화’라 부르긴 어려워
역사적 사건은 소재의 차원으로 격하되고
개인과 시스템 사이에 중간항 빠져


IQ84 1권, 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 656, 597쪽 / 1만4천8백원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는 올해 한일 출판계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온 책이다. 그러나 그 화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단순하다. 현지에서 엄청나게 팔렸고 국내에서 엄청난 로열티를 지불했다는 것이 그 이유의 전부다. 따라서 우리는 『1Q84』에 대해 두 방향에서 접근가능하다. 첫째는 이 책의 작품성에 대한 평가이고, 둘째는 이 책이 많이 팔리는 이유에 대한 탐색이다. 그리고 이는 ‘하루키 문학’ 전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종종 같은 것으로 혼동되는데, 이는 소위 전문독자(평론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이런 착각은 종종 암묵적으로 많이 팔린 책은 좋은 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신경숙, 공지영, 황석영에 대한 문단의 애매한 평가를 보라).

나는 오랫동안 하루키의 작품에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자의 관점에서다. 쉽게 말해, 하루키의 작품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다. 이를 혼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로서는 매우 유감이다. 최근 『1Q84』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이 오가고 있다. 하루키의 최고 걸작이니, 하루키의 진화(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느니 말이다. 그러나 『1Q84』를 완독한 나의 감상은 그것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하루키는 변하지 않았다. 물론 세상의 어떤 것도 ‘전혀’ 변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변화’가 이전 작품들과 결정적인 ‘단절’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면, 그것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하루키 소설의 연표를 살피다 보면 ‘전회’라고 불리는 작품이 몇 편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몬한사건(1939년)이라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소재를 작품 안에 끌어들인 『태엽감는 새의 연대기』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노몬한사건’ 자체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것과 관련해 중요하게 이야기되는 사건들은 대부분 허구라는 사실이다. 즉 『태엽감는 새의 연대기』의 독자라면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을, 인간의 가죽을 벗기는 이야기나 신경(新京)동물원에서의 학살은 사실이 아니다. 물론 소설을 논하면서 그 안에 존재하는 ‘허구들’을 타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아무리 무게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 안에 들어가면 곧바로 텅 빈 기호가 되고, 그 빈 공간은 소위 ‘하루키적 요소들’로 메워지게 된다는 점이다. 역사적(사회적) 사건은 하루키 소설로 들어가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정도로 격하되는 셈이다.     

『1Q84』는 출간 전부터 ‘옴진리교’라는 시사적 사건을 소재로 다뤘다고 해, 일본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등을 돌리지 않는 작가적 면모가 부각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은 맥거핀에 불과하다. 허무하게도 『1Q84』에서 펼쳐지는 모든 판타지적 사건(세계 자체가 일그러지고 있다)은 10살 때 한 소녀가 한 소년의 손을 잡았는데, 그때 소년이 그 행위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하지 못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를 만회하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인 ‘사랑’(낯간지럽게도 소설 속에서 이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이라는 것의 실체다. 우라사와 나오키(浦汚直樹)의 만화 『20세기소년』에서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아이가 커서 지구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오늘날 게임, 아니메, 라이트노벨 등에서 일반화된 설정으로 소위 ‘세카이계(セカイ系)’쪰로 분류되는 것이다.

하루키는 올해 예루살렘상 수상연설 ‘달걀과 벽’에서 개인(계란)과 시스템(벽)을 대립시키며, 자신은 개인 쪽에 서서 개인을 억압하는 시스템(세상을 지배하는 어두운 힘)에 끝까지 대항하겠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보면 바로 이것이 ‘세카이계’적인 인식이다. 즉 세카이계에는 사회(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무나도 쉽게 개인적 상처가 세계의 종말로 비약되며, 그리고 그런 절대적인 절망이 개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고로 잃은 내 한쪽 눈을 보상받기 위해 (상상으로나마) 다른 모든 이의 한쪽 눈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소위 개인적 상처란 나‘만’ 한쪽 눈을 잃었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융(Yung)적인 세계인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융은 치유란 모두가 결국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원형에 도달했을 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스템에 대항해 개인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개인의 존엄은 개인이 지킬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역사 또는 기억)뿐이다. 물론 그것을 억압하는 것도 사회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회와 하루키가 말하는 시스템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즉 하루키가 말하는 시스템이란 개인들과 완전히 분리돼 오로지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악의 화신’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비록 개인들의 자유를 억압하기는 하지만, 그 사회 자체를 만들고 작동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이기 때문에, ‘개인이 시스템에 대항한다’는 식의 단순명쾌한 언명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세계의 끝’(두 개의 달이 뜨는 1Q84년)에 섰을 때이다.

작품 『1Q84』에서 1Q84년은 1984년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서사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역사성이 탈피되고 구조만 남은 시간 1Q84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야기는 거기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끝난다. 라스트에서 여주인공 아오마메는 1Q84년으로 들어가는 입구(출구가 아니라)가 없어진 것을 깨닫고 자신의 입에 총부리를 집어넣으며, 주인공 덴고는 중요한 것은 달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오마메를 찾기로 마음먹는다. 확실히 애매한 결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책의 속편(또는 3권)을 예상했고, 얼마 전 하루키는 속마음을 들켰다는 듯 실은 속편을 쓰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 이런 출판 전략은 이미 『태엽감는 새의 연대기』때 한 번 사용한 것으로, 마치 완결된 것처럼 1, 2권을 내고(그래서 많은 평론가들이 완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비평을 썼다), 나중에 1, 2권을 합한 것과 비슷한 분량의 3권을 내서 평론가들의 뒤통수를 친 바 있다. 그러므로 나 역시 이 글을 쓰면서 뒤통수가 간지럽지만, 다음 권이 어떤 새로운 발전적 전개를 보여줄 것 같지는 않다는 쪽에 내기 걸고 싶다. 이제 하루키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지 대충 짐작이 간다고 말하면, 나의 지나친 자만일까?

※세카이계 : 작은 관계(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문제가 구체적인 중간항(사회)을 상실한 상태로 추상적인 대문제(세계의 위기, 세계의 종말)로 직결되는 작품을 가리킴.

사진 제공: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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