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주의에 열광하는 국민들
나라사랑은 바람직하지만
‘맹목적’인 애국의 이면을 깨닫고
한국의 모순도 인정해야 할 때

양희정 사진부장
이달 25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한국에서 개최키로 결정됐다. 다음날 일간지들은 일제히 이 사실을 1면에 대서특필했다.  “G20, 내년 11월 한국서 열린다”, “국제 질서 따라가던 한국, 앞으로는 만들어간다” 대부분 G20의 위상, 그런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개중에는 어이없게도 이 대통령의 자리가 오바마 옆자리라던가 동포간담회를 열어 한국계 하인스 워드를 초청했다는 내용도 있다. 잘나가는 듯한 조국의 모습에 나는 왠지 마음은 편하지 못하다. 과도한 애국주의적 과장법이라는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언론의 애국 홍보 보도로 눈살을 찌푸린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경제 섹션에는 세계적인 한국기업 ‘삼성’과 ‘현대차’를 띄워주는 데 여념이 없고, 평소에는 무관심했던 교포 3, 4세들이 뛰어난 활약을 하면 조국의 이름으로 그들을 거창하게 보도한다.

언론이 기사를 이렇게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든 국민들은 ‘국민’ ‘나라’ ‘애국’이란 단어에 열광한다. 굳이 월드컵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각종 영화, 책, 광고에 애국적 요소를 강조하면 잘 팔린다. 관객 천만 명을 넘긴 영화 「디워」는 단적인 예다. ‘대한민국’을 무시할 때도 열광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아이돌 그룹 2PM의 박재범은 5년 전 연습생 시절에 올린 한글 비하 글로 인해 미국으로 쫓겨났고, 「미녀들의 수다」에 출현하는 한 외국인은 자서전에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을 써 한동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물론 국민의 나라 사랑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이 과한 열기는 지나치지 않은가 싶다. 왜 우리 국민은 이렇게 국가라는 키워드에 민감한 것일까. 국가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유난히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국가는 ‘좋은 것’이고, 그것에 반대하는 발언이나 행위는 ‘감히 해서는 안될 매국노적 행위’라고 주입을 받아 왔다. 그것을 부정하는 말들은 ‘나’에 대한 공격일 뿐만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벗어난 일종의 ‘모난’ 행위이므로 사정없이 공격을 받게 된다. 그 결과 국민 영화 「디워」를 비난하는 건 매국행위가 되고, 박재범은 축출돼야만 하는 것이다. 나라에 대한 열등감은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국민들은 자신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히 여겼던 ‘우리’라는 울타리가 허술하단 생각에 불안해진다.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기 시작한다.

이런 불안정한 ‘애국’은 결국 국가를 불안정하게 한다.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만 보려 하기 때문에,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하기 쉽다. 사람들은 뚜렷한 잣대 없이 이리저리 표류하고 언론은 이런 국민들의 정서를 이용하여 기사를 쓴다. 나라의 위상, 발전, 민족이란 키워드를 몇 개만 써주면 국민들은 열광한다. 국민들의 애국심을 조장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국민들을 조종한다. 결국 내면적 뿐만 아니라 표면적, 결과적으로도 국민들의 나라에 대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게 된다. 국가에게 이 거짓된 사랑은 곧 마이너스고, 대한민국에 포함된 우리에게도 마이너스다.

우리는 우리의 애국 이면에 있는 진실을 보아야만 한다. 자신에서 비롯되지 않은 외부에서 주입받은 가치에 의해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에 휩싸여 있진 않은지 끝임 없이 확인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각종 언론의 피상적인 과장된 보도에 의해 매도되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대한민국의 모순과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맹목적인 ‘애국’보다는 제대로 된 ‘애국’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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