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숙히 침투한 영어
익숙한 만큼 성찰도 필요
영어사대주의에 대한
견고한 방어벽 구축할 시기

손일수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
한국인이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혹은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 사실 우리나라에서 영어는 더 이상 학습 대상으로 범주화되길 거부하는 일상이요, 삶이다. 이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동경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영어를 학습할 필요도 없이 영어 구사 능력을 획득할 수 있는 환경을 갈망하고 조성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배우는 것은 일본여행을 가기 위해 일본어를 배우거나 프랑스시를 읽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과 다르다. 당위적으로 그래야함이 마땅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일반의 인식과 사태의 추이는 그러하다.

필자는 이 현상 자체를 반드시 식민의식의 차원에서 문제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더 많은 사람이 하나라도 자국어 이외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굳이 ‘세계화 시대’라는 식의 역사적 불가피성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긍정적인 현상이라 본다. 영어가 필요한 사람만 필요할 때 배우면 된다는 의견도 일리가 있지만, 그러한 발상에 정보를 독점하고 해석하는 지식 권력집단을 구성하고 승인할 가능성은 없는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영어를 일상에서 되도록 자주 구사해보고, 일기를 영어로 써본다거나 한국인들끼리 영어 토론을 하는 일련의 행위들 속에 굳이 내면화된 식민성을 전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들이 반복되며 일상화될수록 익숙한 현상을 낯설게 보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태도 역시 비례해 상승해야 마땅하다. 우리의 현실은 소위 영어중심주의, 영어제국주의와 맞서 투쟁해야 할 전장이 어디인지를 가려내고 대비하기 위해 더욱 정확하고 섬세한 현미경을 요구한다. 국가 정책과 가시적인 교육 제도 역시 중요하지만, 영어가 우리의 일상과 내면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면 영어중심주의, 사대주의는 영어몰입교육 방안을 좌절시킨다고 패퇴하지 않는다. 초중고교의 영어수업 시간을 줄인다고 해서, 국사와 국문학 수업을 한국어로 가르치는 방침을 수호한다고 해서, 한국인의 주체성이 자동적으로 향상되고 영어사대주의에 대한 견고한 방어벽이 구축되지는 않는다.

필자가 학부생이었던 당시, 고대 희랍로마문학 강의 첫 시간에 강사는 학생들에게 혹시 호메로스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때 1, 2학년 정도로 보이던 한 학생은 ‘원서’로 읽어봤다고 대답했다. 중국정치외교 수업을 들은 한 친구는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한국인 교수가 수업을 ‘원어’로 진행했다고 한다. 철학과에 다녔던 한 친구는 마땅한 번역본이 없어서 수업시간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원서에서 발췌해 읽었다고 한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지만, 사실 확인 결과 세 경우 ‘원서’나 ‘원어’로 지칭된 언어는 모두 영어였고, 세 사람 모두 용어를 잘못 사용했다. 한국의 대학생 중에 『오디세이』나 『일리아드』를 고대희랍어로 읽은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극히 미미하다. 필자가 아는 한, 칸트는 영어로 저술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한국대학에서 중국정치외교를 강의하는데 교수가 구사하는 영어가 ‘원어’로 불릴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근대 이전 서양에서는 ‘원서’라고 하면 거의 라틴어로 쓰인 텍스트를 가리켰고, 르네상스 이후에야 루터가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데카르트가 프랑스어로 저작을 남기기 시작했다. 18세기와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각 민족의 언어, 문화가 주목받고 부흥하기 시작하며 저마다 정통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때부터 번역 작업 역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영어가 21세기의 한국에서 중세 라틴어의 권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캠퍼스 내의 사소한 언어습관에서부터 비판적인 검토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거기서 끝나지도 않아야 한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