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언론이 유린해 온
의미와 가치를 담은 단어들
정치적 프로파간다 깨고
그 진정한 의미 되물어야

오민욱
서어서문학과 석사과정

“이념과 정치 투쟁에 대한 우리의 단어들은 그들 스스로 때문에 쇠약해지거나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적들이 그것을 악용했고 또 우리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단편소설 작가인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말이다. 그는 1981년 스페인의 「엘 파이스」지에 「유린된 언어(Las palabras violadas)」라는 글을 실었고 앞에서 인용한 문장을 요지로 언어가 정치나 이데올로기를 통해 유린당하고 악용됐음을 개탄했다. 그의 말대로 나치는 ‘문화 수호’라는 이름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했으며, 아르헨티나의 어느 독재자는 ‘우리는 옳고 인간적이다’라고 외쳤으나 그 정권하에 3만명의 사람이 사라졌다.

신문이 생긴 이후 정치면에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는 단연 ‘자유’나 ‘평등’일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해 정당 대표 등 주요 정치인들 모두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장 큰 가치로 ‘자유’와 ‘평등’을 말한다. ‘경제발전’ 역시 마찬가지다. 그 어느 정당, 혹은 거기에 속해있는 그 어느 정치인도 ‘경제발전’이란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이 ‘자유’, ‘평등’, ‘경제발전’을 지향하는데 이 시대 대한민국은 갈등이 가라앉지 않고 점점 커져만 간다.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를 가리키는 말들은 언제나 쓰는 사람에게 ‘유린’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쓰고 싶고 해석하고 싶은 의미로 그것을 사용한다. 듣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자유’라는 말을 수없이 쓰고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명박정부는 거리를 안전하게 거닐 수 있는 ‘국민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촛불을 든 ‘폭도’들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그 말을 하는 사람도 ‘자유’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더는 생각지 않는다. ‘폭도’들 역시 정부가 지켜야 할 국민이며 그들에게 집회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서민’이란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는 경제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 설명한다. 그 말을 듣는 우리 또한 ‘서민’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정책의 내용이 옳은지는 생각지 않는다. 계속 들어온 ‘서민’이라는 유린당한 단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단순히 정부가 시행하는 일이 좋은 정책일 것이란 이미지와 자신들이 ‘서민’의 범주에 들어가려니 하는 생각에서 오는 안도감만을 얻을 뿐이다.

코르타사르가 말했듯 단어는 사용자에 의해 유린당한다. 이후 그것이 본래 뜻을 잃고 사람들을 속이게 되면 나치나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독재정부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가 반복해 발생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09년 한국에서 역시 서로 간의 정쟁 때문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수많은 가치를 가리키는 단어가 변질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원래의 뜻을 잃어버린 채 반복해서 사용됨으로써 그것이 진정으로 가리키는 개념이 무엇이었는지 사람들은 사유하지 못하게 됐다. 이 시점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 것인가가 아니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와 가치들에 대해 생각해 볼 시점이다. ‘자유’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지, ‘평등’은 어떤 범위로 적용되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러한 사유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우리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선택들이 어떠한 기준으로 결정돼야 할지 되짚어 보게 될 것이다. 뜬구름 잡는 원칙적인 이야기 같지만 지금은 그 원칙을 한번 생각해 볼 때다. 아르헨티나의 단편작가가 주장했듯 단어들에 원래의 빛을 되돌려 주고, 그것들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진심으로 생각해 본다면, 우리 사회가 맞아야 할 비극을 피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에 드리운 어둠과 갈등은 누군가가 어떤 새로운 생각을 해내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이상을 담은 말들에 그 본래의 뜻을 돌려줄 때 헤쳐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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