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과 연구실과 실험실은 이사준비로 분주하다. 이제 겨울 방학이면 기다리던 새 건물이 완공될 것이다. 바뀐 환경에서 연구하고, 또 강의하게 되는데 이것이 마냥 기쁘고 설레지만은 않은 것이 이삿짐 싸기 귀찮은 내 게으름 탓일까, 지난 추억에 대한 미련한 향수 때문일까?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늙어가는 나이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 기회가 아니면 연구실 정리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책장, 서랍, 서류함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서랍 속에는 소중하게 간직해온 실험 데이터 원본이 그 옛날 5.25인치 디스켓에 고이 담겨 보관돼 있다. 그 이후 생겨난 저장 매체들도 박물관처럼 진열된 것이 내 전공이 ‘저장매체 발달사’정도 되는 것 같다. 저런, 이리도 소중히 모셔 놓았으나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읽을 방법이 없는 것을…. 디스크드라이브 구하기도 어렵겠거니와 그 안에 있는 파일 포맷을 읽을 수나 있을까? 그러면 당연히 버려야 하지만 막상 디스켓을 든 손은 다시 서류함 안으로 향한다. 내가 만들어낸 데이터라는 자부심, 이걸 언젠가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등의 이유를 변명으로 들지만 결국 옛것을 버릴 수 없는 마음 그 하나다. 이번에는 책장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책장 상황은 조금 나은가? 적어도 개정판을 구한 책의 이전 판은 정리해 두었다. 하지만 한 권 한 권 들여다보니 지난 이삼년간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 보여 한 편으로 쌓아 놓았다. 책장 한구석에는 내가 공부했던 교과서도 몇 권 보인다. 인문계열의 고전문학도 아니고 자연계열의 30년 전 교과서라면 정리를 해도 좋을 책이건만 이것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내가 처음 접했던 원서, 나를 이 자리까지 끌어준 동기가 됐던 교과서….

이사라는 사건이 나를 관악을 처음 접한 30여년 전으로 돌아가게 한다. 내가 처음 관악을 보았을 때의 가슴 벅찼던 감정, 그리고 13동 현관을 들어섰을 때의 희망이 나를 지금 이곳에 있게 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난 30년의 세월을 돌이켜 본다.

세상을 살아가며 사람은 무수한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러한 갈림길마다의 선택에 의해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됐기에 ‘만약 내가 그때 다른 길을 택했다면?’ 하는 후회나 가정은 무의미하다.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 했던가? 달아난 양을 찾다 갈림길이 많아 결국 양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로 양(羊)자는 학문의 길에서 무수한 학설에 빠져 목표를 잃고 헤맬 것을 염려하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무수한 갈림길과 그에 따른 선택 없이 어떻게 학문과 인생이 완성될 수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양의 흔적을 좇아 수많은 갈림길을 거쳐 겨우 이만큼 다다랐다. 양을 찾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다. 가끔은 선택한 길을 가다 의심이 들어 원점으로 되돌아가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이미 양이 아닌 나 자신이 미아가 되고 만다. 그러니 만약 옆길에서 양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면 그리로 통하는 길을 직접 닦아라. 그리고 가도 가도 양의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의 선택을 믿고 전진하는 신념을 길러라. 확신을 가지고 접어드는 길의 끝에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양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나저나 난 또 하나의 갈림길 앞에 서고야 말았다. 이걸 버려야 해, 말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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