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케시마 에미 기자
감히 서울대의 교기(校技)라 지칭될만한 ‘팩차기’가 봄볕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캠퍼스에서 한창이다. 이는 타대에서는 볼 수 없는 서울대만의 이색적인 놀이문화다.

점심시간이나 공강시간에 캠퍼스 곳곳에서 행해지는 팩차기는 특별한 도구나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아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데다, 여럿이 함께 즐기면서 친목 도모도 가능해 서울대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크로에서 자주 팩차기를 한다는 서진욱씨(재료공학부ㆍ04)는 “다음 시간에 수업이 있어도 땀이 그다지 많이 나지 않아 수시로 할 수 있다”며 “점심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동기들과 정도 쌓을 겸 팩차기를 한다”고 말했다.

팩차기는 서너 명에서 일곱 여덟 명, 많게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다 마신 빈 우유 팩, 특히 커피우유팩을 겹쳐서 마치 제기를 차듯 서로 주고받는 놀이다. 이 과정에서 팩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하며, 팩이 땅에 떨어질 경우에는 맨 마지막에 팩을 찬 사람이 ‘죽게 되어’ 원 밖으로 나가야 한다. 죽어서 밖으로 나간 사람은, 팩차기를 하는 사람들이 팩을 찬 개수 만큼 팔굽혀펴기를 해야 한다. 이 때 정해진 개수 이상을 찰 경우에만 죽은 사람이 팔굽혀펴기를 하게 되는데, 이 정해진 개수를 ‘본(本)’이라고 한다. 가령 ‘본’이 5이고 팩을 7개 찼다면 밖으로 나가있는 사람은 팔굽혀펴기를 일곱 번 해야 한다. 이 팩차기를 보통 ‘건강팩’이라고 한다.

팩차기에는 건강팩 외에도 돈팩, 목표팩, 골넣기 팩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자본주의 팩’이라고 불리는 ‘돈팩’은 건강팩의 벌칙인 팔굽혀펴기 대신에 횟수당 100원씩 돈을 내는 게임이다. 팩을 한 번도 떨어뜨리지 않고 목표갯수만큼 차야 하는 ‘목표팩’은 ‘기록팩’이라 부르며, 목표는 20개∼ 50개 정도로 잡는 것이 보통이다. 또 ‘골넣기팩’도 있는데, 죽은 사람이 두다리를 벌려 골대를 만들고 그 골대로 팩을 골인시키면 된다.

그런데 팩차기에 몰두하다 보면 행동 반경이 자연스럽게 넒어지게 되고, 또 중앙도서관 부근, (인문대)해방터, (사범대)내정 등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 팩차기의 ‘명당’이다보니 사람들의 보행권을 침해하기도 한다. 해방터를 자주 지나다닌다는 한 학생은 “팩차기하는 사람들 근처를 지나갈 때 움찔하게 되고 어떤 때는 팩을 쫓아오는 사람과 부딪히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한 여럿이서 함께 하다보니 소란스럽기도 하다. 사범대 내정에는 “이 곳은 교수연구실과 강의실이 인접한 곳이니 운동, 일체의 소란행위를 삼갑시다 사범대 학장”이라는 푯말이 서 있기도 하다.

한편, 팩차기의 시원은 ‘서울대학교 50년사’에 따르면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명칭은 ‘우유팩으로 제기차기’였다. 그 후 팩차기는 캠퍼스에서 붐을 일으키며 퍼져나가 92년 대동제에는 ‘관악대동제 팩차기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심지어 일몰 즈음부터 밤 늦게까지, 불빛이 새어나오는 도서관 통로에서 발디딜 틈 없이 팩차기를 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박재우씨(외교학과 졸업ㆍ93)는 “내가 학부생이었을 때는 ‘식사-커피우유-팩차기’가 식사시간의 공식처럼 통용됐다”며 “식사 후 커피우유를 마시고 팩차기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팩차기는 상당히 일상과 밀착된 놀이였음을 보여준다. 실제 90년대 초에는 “팩차기를 자제해 달라”는 대자보가 심심찮게 나붙고, 『대학신문』의 ‘독자의 소리’에도 팩차기와 관련된 독자 투고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 팩차기는 학기 초 새내기들이 들어오면 잠시 성행할 뿐, 그 이후에는 주로 고학번이나 중도에서 공부하는 고시생들만이 즐겨 하는 추세다. 90년대 말 학내 전산시설이 개설됨에 따라 통신이나 인터넷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컴퓨터 게임이나 보드 게임 등 새로운 놀거리가 출현함에 따라 팩차기를 즐기는 사람이 적어진 까닭이다. 또 대체로 팩차기는 남학생들이 선호하는데 근래 여학생 입학률이 높아진 것, 신새대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진 것 등도 팩차기가 차츰 뜸해지는 한 요인으로 분석할 수 있다. 십여 년 간 서울대인과 함께 해 온 팩차기, 앞으로 얼마나 학우들의 사랑을 받을지 지켜볼 일이다.

재미로 보는 - 팩차기 용어 사전

▲초구: 팩차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처음 찬 팩이 떨어졌을 경우 실수로 보고 그냥 넘어간다.
▲‘겐세이’: 나무나 사람 등 장애물로 인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팩을 차지 못했을 경우를 가리키는 말로, 이때는 다시 팩차기를 시작하고 이전까지 찬 개수에 이어서 계속 더해간다.
▲앞발금지: 앞발은 손을 지칭한다. 즉 손으로 팩을 차서는 안 된다.
▲‘알깠다’: 팩이 다리 사이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벌칙이 2배, 3배가 된다. (강간)당했다는 용어도 있으며 여성비하적이라는 이유로 대자보가 붙기도 했다.
▲‘지랄’: 처음 팩을 찬 사람이 연이어 두 번을 차다가 팩을 떨어뜨리면 벌칙이 2배가 된다. ※ 각 과나 단대마다 특색있는 용어가 존재하고 규칙도 조금씩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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