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라디오를 살펴보다

사회 소수자들이 직접 만들고 운영해…
정부 정규사업화 했으나 추후 정책 전무

그래픽: 김지우 기자 nabarium@snu.kr
FM 100.7Mhz에 주파수를 맞추자 ‘신라의 달밤’, ‘만리포 사랑’ 등 추억의 트로트 노래를 배경으로 두 DJ의 구성진 입담이 봇물 터진 듯 흘러나온다.

“핑크색 옷을 입으니까 오늘따라 더 예쁘네. 안 그래도 예쁜데 화장은 왜 고쳐요?”(남성 DJ) “카메라 왔는데 예쁘게 하는 게 예의죠.(여성 DJ)

매주 수요일 6시, 전파를 타고 찾아오는 젊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영자 할머니(69)와 연제은 할아버지(71). 평소에는 집에서 손자, 손녀를 돌보는 평범한 노인이지만 수요일만 되면 그들은 명콤비 DJ이자 ‘라디오스타’가 된다. 마포구의 지역 공동체 라디오 방송인 마포 FM에선 자주 있는 일이다.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 모여 실버 프로그램 「행복한 하루」을 비롯해 아줌마들의 수다를 담은 「라랄라아줌마」, 홍대 인디밴드와 함께하는 「뮤직 홍」 등 방송을 이끌어 나간다.

지금 라디오를 켜봐요

이처럼 지역주민들의 참여로 이뤄지고 일정한 FM 주파수 대역에서 방송되는 1와트 규모의 소출력 라디오를 ‘공동체라디오’라 일컫는다. 출력이 1W밖에 안되기 때문에 가청 지역은 반경 500m~1km 이내 소속 구에 국한된다. 국내에선 1947년 농부들을 대상으로 지역 공동체에 필요한 기술을 전파한 콜롬비아의 「라디오 수따뗀사」, 1949년 탄광 노동자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렸던 볼리비아의 탄광 노동자 라디오 네트워크 등을 모델로 2005년 정부가 시범 사업을 진행하면서 시작됐다.

현재 국내에는 관악 FM(서울 관악), 마포 FM(서울 마포), 분당 FM(경기 분당), 성서 FM(대구 성서), 나주 FM(전남 나주), 금강 FM(충남 공주) 등 7개 방송국이 지난 5년간 시범 운영 기간을 거쳐 올해 초 정규 사업으로 승격된 상태다. 이외에도 광주, 마산, 제천, 진주 등 21개 지역에서 신규 방송사업을 준비하는 등 국내 공동체 라디오는 태동기를 맞고 있다.

풀뿌리민주주의의 실현, 공동체라디오의 힘

공동체 라디오 프로그램은 기존 라디오에선 다루지 않았던 지역 소식, 비주류 문화, 주민들의 의견 등을 다룬다. 성적소수자나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등 사회소수자라도 마을 주민이라면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박영자 할머니와 연제은 할아버지처럼 직접 DJ로 활동하는 것은 물론 PD, 음향, 영상을 비롯한 모든 역할을 지역 주민들이 담당한다. 방송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매년 방송국 측에서 준비하는 강좌를 수료하면 제작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네팔 출신의 이주노동자 ‘슈라즈’는 성서 FM의 「이주노동자방송」을 진행하고 공주 FM에서는 아이들이 대본을 짜고 인터뷰를 하며 「어린이 초대석」을 꾸려간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만큼 공동체 라디오는 다양한 집단의 목소리를 골고루 담아낸다.

공동체 라디오가 지닌 개방성을 통해 지역주민들이 방송에 참여하고 지역여론을 조성하는 계기가 마련되면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DJ를 비롯한 스탭진 모두 레즈비언인 마포FM의 「L 양장점」은 레즈비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한국사회에서 폐쇄적이었던 성적소수자 인권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국공동체라디오협의회 박채은 대표는 성서FM의 장애인권 프로그램 「담장 허무는 엄마」의 사례를 강조했다. 그는 “장애모들이 육아 일기를 읽으며 열악한 장애 제도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은 것을 계기로 지역에 장애인 인권 공동체가 생기더니 학교에 장애인 엘리베이터가 마련되는 등 변화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커뮤니티라디오협의회 정수경 부회장도 “공동체 라디오만큼 지역자치 혹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적합한 매체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동체 라디오에선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직접 주인공이 된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절실한 사람들이 방송에 참여해 방송의 공공성과 공익성 가치를 실현할 뿐 아니라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시 라디오를 켜봐요

현재 공동체 라디오는 한차례 열병을 앓는 중이다. 올해 초 방송통신위원회가 2005년 시범사업 당시 설립됐던 8개 지역 공동체 라디오 중 나주 FM을 제외한 7개 지역 방송을 정규 사업화했지만 이에 대한 지원이나 추후 정책안은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1월부터는 인터넷방송시대에 라디오가 무슨 실효성이 있느냐며 공동체 라디오에 대한 지원금이 전액 삭감돼 공동체 라디오는 자발적인 생존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실정이다.

정부의 지원이 끊긴 후 공동체 라디오는 고비를 겪고 있다. 마포 FM은 폐국위기에 처했다가 주민들이 직접 모금에 나서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 외의 공동체라디오도 지역 주민들의 후원금으로 근근이 운영되며 신규 프로그램의 제작이 줄고 재방송 비율은 부쩍 늘었다. 금강 FM 김광육 국장은 “운영비를 60~70%선으로 낮추다보니 겨우겨우 방송국을 운영하는 형편”이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실제로 나주 FM은 지난 9월 재정난과 인력부족으로 인해 문을 닫으면서 정규 사업체 명단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대책으로 가청범위 확대를 꼽았다. 방송매체의 수입원은 광고수익뿐이지만 현행 1W의 출력규모에서 가청범위는 500m~1km에 불과해 광고를 할 수 없다. 김경환 교수(상지대 언론광고학부)는 “해외에선 지역적 특색과 실제 생활권을 고려해 탄력적으로 출력규모를 부여한다”며 “출력 규모를 융통성있게 부여하고 규제기관이 설립 지역의 정확한 가청 범위를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터넷을 통한 공동체 라디오 방송도 가청 범위를 넓힐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성동규 교수(중앙대 신문방송학과)는 “공동체 라디오는 지역사회발전에 도움이 되고 지역밀착형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만큼 지원·육성해야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공동체 라디오는 방송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관악 FM의 안병천 국장은 자신이 방송자금을 조달하고자 직접 과외를 뛴다. 그렇게 해서라도 담아내고 싶은 우리 동네 이야기는 무엇이었을지, 라디오 주파수를 100.3Mhz(관악 FM 주파수)로 맞춰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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