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0월 19일 밤 / 하나의 물음표(?)로 시작된 / 나의 인생은 / 몇 개의 느낌표(!)와 / 몇 개의 말줄임표(……)와 / 몇 개의 묶음표(< >)와 / 찍을까 말까 망설이다 그만둔 / 몇 개의 쉼표(,)와 / 아직도 제자리를 못찾아 보류된 / 하나의 종지부(.)로 요약된다” 시인 임영조는 ‘자서전’이란 시에서 자신의 인생을 문장부호 몇 개에 빗대어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말줄임표는 성찰, 고뇌, 인내 등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비문(碑文)에 말줄임표가 새겨져 있다면 어떤 의미일까? 승려 중광의 ‘괜히 왔다 간다’, 스탕달의 ‘살고, 쓰고, 사랑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여기 쉬다’ 등 간결한 비문은 들어보았으나 말줄임표가 각인된 경우는 접해 보지 못했다. 무슨 사연이 있을 터.

61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발했다. 당시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군인들이 이승만 정부의 4·3항쟁 진압 명령에 불복해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으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남 동부지역 일대의 수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학살됐다. 이 무고한 영령들을 위로하고자 유족회와 여수시가 위령비를 만들었으나 ‘학살’이라는 문구가 문제가 돼 유족회 측에서 마련한 비문이 실릴 수 없게 됐다. 이에 위령비에는 말줄임표가 새겨졌고 이것에는 “유족들이 속으로 삭여야 하는 분노와 한, 울분 등이 담겨 있다”고 한다.

지난 2005년에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회)가 내년 4월 활동을 마치게 된다. 위원회는 그동안 한국전쟁을 전후한 무고한 희생과 과거 정권들의 인권침해 등에 대한 진상 규명을 통해 피해자·유가족에 대한 배상 및 명예회복 측면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여전히 뿌리 깊은 기득권층의 반발과 홀대에 부딪혀 재심 권고 사안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관계기관의 비협조로 진실 규명이 좌절되는 등 진정한 화해를 위한 기반을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현재 국감에서는 위원회 소멸을 대체할 ‘과거사연구재단’ 설립을 두고 여·야간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해방 정국 ‘반민특위’의 와해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인권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현 정부가 실용적이지 못한 과거사 청산 따위에 진지하게 접근할지는 의문이다. 위령비에 새겨진 말줄임표가 온전한 비문에 자리를 내어줄 날이 그리 가깝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날까지 겪어야 할 속병이 간신히 아문 유족들의 상처를 다시 도지게끔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깨치고 보듬어온 소중한 가치와 성숙함의 불멸을 믿고 싶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여러 방면에서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역사의 큰 물줄기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섬진강 시인의 말처럼 역사라는 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떠낸다고 마르겠는가.

장준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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