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 애환의 삶
민화에 담아내
사회 부조리를 파헤쳐

사진: 이다민 기자 aasterion@snu.kr
「을지로 순환선」 을 그린 이는 홍익대 서양화과를 나와 민중 미술가로 활동하며 현대 풍속화가로 알려진 최호철 작가다. 지난해 그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와 애환을 고스란히 그림에 담아 엮은 책 『을지로 순환선』을 출판해 주목받았으며, 지난 9월 부천만화대상에서는 1970년대 노동자 인권을 위해 생명을 불살랐던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일대기를 다룬 ‘태일이’로 대상을 받았다.

 그가 현재 재직 중인 청강문화산업대의 작업실은 천장까지 이어진 온갖 만화책과 만화관련 서적들 그리고 드로잉북들로 가득차 있었다. 빽빽이 늘어선 책장 사이 통로를 지나면 어느새 또 하나의 공간에 도달한다. 널찍한 책상 주위에 정신없이 놓인 그림 재료들과 방금까지 그리고 있던 듯한 그림, 익살스럽게 그려낸 인물 크로키와 풍경화들로 빈틈없이 채워진 벽은 그의 열정을 짐작게 했다. 그는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한 남자의 초상이 전태일이라고 알려주며 그의 삶과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80년대 말 군 제대 후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고 이 사람의 일생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전태일을 좇아 1988년 청계피복노조가 운영하는 노동자문화학교에서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고 전태일의 삶을 10쪽짜리 단편만화로 그리기도 했죠. 그러다 출판사의 제의로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취재허락을 받기 위해 찾아간 전태일 열사 어머님으로부터 대충 할 거면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던 게 기억에 남네요. 그러고 보니 전태일을 그려보겠다는 바람이 20년 후에야 이뤄졌네요.”라며 회상에 잠긴다.

 1970년대 극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난을 함께 겪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 삶을 바친 전태일은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화폭에 담아내는 그의 ‘그림관’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그린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 절반 이상이 사회적 약자다. 그는 화려한 도시 이면의 좁다란 골목길, 철거를 앞둔 건물 등의 모습과 함께 노동자와 비정규직자 등, 소외 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제가 학교에 다니던 때는 군사독재시절로 민주화 운동이 활발했고 학생들도 그런 의식이 투철했죠. 그때부터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세상에는 가난하고 약자인 사람들이 대다수고 또 전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주인공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삶을 주목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그림에 담아내려 노력합니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은 현장감이 넘쳐난다. 실제로 그는 용산참사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직접 현장에 가 그림으로 담아낸다. 청계천 사업으로 쫓겨난 노점상들의 모습과 촛불시위에서부터 최근에는 생태계를 짓밟는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웹 만화를 그려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한편 만화로 진출하는 회화 전공자가 흔치 않은 상황에서 홍익대 서양화과 출신인 그가 어떻게 만화의 길로 뛰어들게 됐는지 궁금해진다. 이에 그는 민중미술 활동을 하면서 작품을 전시하는 데 한계를 느끼게 됐고 그것이 그가 만화와 순수미술, 그리고 대중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작업을 하게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한다. “전시를 하게 되면 보통 전시는 7시쯤에 문을 닫으니까 공장에서 노동하는 친구들은 일이 늦게 끝나 올 수가 없더라고요. 휴일에도 고된 일로 피곤할 텐데 쉬는 날을 버리면서까지 제 전시를 보러 올만큼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보러 오라고 하지도 못했어요. 그들을 위한 그림인데 정작 그들이 보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한 번 전시하고 끝날 게 아니라 여러 장으로 인쇄돼는 매체를 이용해 많은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는 게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화를 그리면서 회화적인 요소와 자연스럽게 접목된 것 같아요.”

 평소에 그는 현대 풍속화가라는 명칭에 걸맞게 주위의 일상을 보고 그리는 걸 즐긴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산동네 꼭대기 골목 어귀에서 출발해 거미줄처럼 얽힌 삶의 풍경 속에서 사람들의 서사를 담아낸다. 그가 천장에 높이 쌓인 크로키북들을 손으로 가리킨다. 언제나 크로키북을 들고 다니며 주위를 그리다 보니 지금까지 쌓인 것이 자그마치 130여권이라고. 그렇다면 많은 걸 직접 보고 그리기 위해 여행 같은 건 자주 다니냐는 물음에 그는 “아뇨. 게으름 탓인지 많은 곳을 돌아다니진 못해요”라며 “제 그림들을 보면 제 생활 반경이 뻔히 들여다보여요. 대신 주위의 익숙한 풍경들을 낯선 느낌으로 새롭게 바라보려 하고 그 ‘본 것’들이 얽힌 관계를 찾아내려 하죠”라고 답하는 모습에서 그의 진솔함이 느껴진다.

 현재 그는 새로운 작업들을 구상 중이다. 4대강 사업 주변에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내쫓는 정책이나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집값 폭등과 같은 사회의 부조리를 더 날카롭게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그는 “그림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려면 제겐 아직 많은 공부와 취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숙제들이 제 작업 활동에 많은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라며 여운을 남긴다. 세월이 지나 거창한 평가를 받기보다는 한 시대의 기록의 일부가 되는 것도 좋다는 최호철 작가. 그의 붓끝에선 지금도 인천 부둣가 노동자, 연안부두 횟집 아낙네, 송림동 달동네 노인 등 구석구석 숨겨진 사람의 이야기들이 한 장의 그림 속에서 촘촘하게 엮여 새로이 태어나고 있다.

「을지로 순환선」의 지하철 안에는 저마다 고민에 잠긴 군상들로 가득 차있다. 한 소녀가 바라보는 바깥풍경에선 육중한 외관의 공장 건물이 위압을 과시하고, 색색의 기와지붕이 차곡이 쌓인 서민 주택가는 곧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롭다. 가로 216m의 큰 화면을 섬세한 필치로 빼곡히 채운 그림체에선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서민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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